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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in Dec 10. 2023

안부

작은 도시로 이사를 온 지 네 달이 되어간다. 이사를 왔을 땐 여름의 끝자락이라 쉬는 날에는 어김없이 나가 걸었고 수영을 가기도 했다. 그렇게 여름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고 완연한 가을이 왔다.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첫눈이 왔다. 10월의 마지막날 첫눈이 내렸다. 아침부터 오던 눈은 하루종일 내리더니 금세 집 앞에 소복이 쌓였다. 그 뒤로 눈은 두어 번 더 내렸다. 살면서 눈 내리는 겨울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내가 어릴 때 오빠와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기억이 난다. 눈 내리는 겨울은 우리에게 조금은 특별했던 시간이었나 보다. 내가 사는 도시는 아주 작은 도시이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번씩 다니고 일요일엔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공휴일에도 버스가 다니지 않아 혹여나 좀 멀리 나가려면 택시를 불러야 한다.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쇼핑몰이 있고 그곳에 영화관과 서점이 있다. 쉬는 날 다리를 건너 다운타운에 가거나 좀 더 멀리 나가 쇼핑몰을 돌아다닌다. 대부분 여가시간에 가는 곳이 정해져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도 늘어났다. 특히나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는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날이 추워져서 수영장을 나서면 으슬거리는 추위에 수영장은 가지 않고 있다. 그 사이에 처음으로 뜨개질로 조끼 하나를 만들었다. 만들려던 모양과는 조금 달라져서 마무리만 하면 되는데 하지 않고 다시 다른 걸 만들기 시작했다. 일상의 시간들이 많이 단조로워졌다. 이전과 달리 일하는 시간도 고정적이라 이젠 많이 피로하지 않다. 특별하게 외출할 일이 없으니 옷을 살 일이 없어졌고 나에게 주어진 방 한 칸에 더 이상은 짐을 늘리지 않으려고 한다. 한국을 떠나 지낸 지 4년이 넘은 사람치고는 짐이 없는 편인데도 늘 이사를 생각하면 짐은 많게 느껴진다.

지금 사는 곳은 내가 살아본 세 번째 도시인데 이곳이 가장 작은 곳이다. 아시안들이 많이 살지 않는 지역이라 처음에는 어딜 가도 아시안은 나뿐이라는 사실이 어색했다. 버스를 타면 대부분의 기사님들은 매우 친절하고 밝게 인사를 건네주신다. 버스정류장에서 같이 기다리던 할머니가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걸어가다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에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아주 큰 강이 있다. 여름에는 윤슬이 가득하다. 강 주변 푸르던 나무들이 단풍으로 물들었다. 겨울이 오면 큰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걸어 건너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겨울이 오기 전에 많이 걸어야 한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보는 강과 나무는 그저 반짝이고 푸르다. 다리를 건너 되돌아오면 도로 옆 길 바깥에 강가로 걸을 수 있는 길이 보인다. 해가 긴 여름 낮에는 그 길로 걸어오기도 했다. 해가 진 저녁에는 도로 옆 길로 걸어온다. 큰 나무들이 가득한 강가 옆 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까만 어둠뿐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나무가 빽빽한 그곳의 까만 어둠은 처음 느끼는듯한 집어삼킬듯한 어둠 같았다. 해가 진 저녁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까만 강물 보다 숲의 어두움이 더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짧은 가을동안 부지런히 걸었다. 그래봐야 다리 건너 다운타운을 가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아이스커피가 맛있는 카페를 알았고 비건 음식이 맛있는 다른 카페도 알게 되었다. 유일한 큰 미술관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오래되고 유명한 그림들을 잔뜩 보기도 했다. 동네 서점에서 좋아하는 한국 작가의 영문 소설을 샀었고 몇 달 찍어둔 필름을 동네 사진관에 맡겼다. 일요일에 버스가 안 다닌다는 사실을 처음에 알고 놀랐었는데 이번에 맡긴 필름이 한 달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또 놀랐다. 이러다 올해가 지나고 사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사를 온 후 영화관에 자주 갔다. 좋아하는 영화들은 따로 구매해 집에서 자주 보기도 한다. 내 계획으로는 내년이 지나서야 다시 다른 도시로 갈 수 있다. 네 번의 계절을 한번 더 보내고 그다음 여름이 오기 전에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또 먼저 어디론가 떠날 것이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쌓일 시간들을 생각하곤 한다. 며칠 전 문득 친구의 편지가 생각나 찾아보았다. 지나온 시간들에 남겨진 마음들이 편지로 쌓였다. 떠나온 도시와 내가 떠난 혹은 나를 떠난 누군가를 생각한다. 몇 번의 눈이 더 올까? 쌓인 눈이 다 녹아 사라질 즈음 겨울이 끝나는 거라고 했다. 윤슬이 일렁이는 끝도 없이 반짝이는 강물을 보게 될 계절은 또 금방 올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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