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거기엔 푸른(靑) 바다가 땅으로 서서히 밀려 들어와서 만들어졌다는(浦) 곳이 있다. 그곳 청포대를 바라보며 사람의 인연도 이와 같이 밀리기도 하고 쓸리기도 하다 자리 잡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뭍과 물이 만나는,참으로 흔한 풍경을 보고 이런 쓸데없는 감상에 빠진 건 얼마 전 누군가 내게 했던 질문 때문이다.
‘너는 그리워하는 인연이 있어?’
‘응’
‘그 사람이 다시 보고 싶어?’
‘아니’
‘그럼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는 거야?’
‘아니, 그저 앞으로 내 남은 할 일이 있다는 걸 말하는 거야’
그 친구는 무슨 대답이 그러냐며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고, 나는 싱겁게 웃었다. 그 웃음은 이 것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어려워하는 나의 난처함과 겸연쩍음 대신이었다.
그리워한다는 게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립다는 것은 사랑했다는 말의 또 다른 말이다.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거나 재회를 염원해서가 아니라, 이제 조금만 슬프고 사랑할 일이 더 많길 바라 서다. 울어야 할 일보다 웃을 일이 더 많길 바라 서다.
사랑을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움도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애수나 허전함과 같이 사랑 뒤에 오는 것들을 달래 주는 일 또한 각자가 해내야 할 몫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리움이 해치워야 할 숙제 같은 일이 아니라, 기도 같은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과 나의 행복을 소원하는 기도,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상처들이 언젠가 사랑으로 메워지길 바라는 기도 말이다.
나는 오래전에, 어떤 헤어짐으로 인해 누군가를 길게 그리워하던 끝에 그 사람에게 편지를 부친 적이 있다. 이제는 제대로 당신에게 안녕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편지의 끝인사를 뭐라고 쓸까 며칠을 고민하다가 맺음말에 이렇게 적었다.
‘잘 지내, 그럭저럭 잘 지내지 말고 아주 잘 지내.’
태안, 거기엔 푸른(靑) 바다가 땅으로 서서히 밀려 들어와서 만들어졌다는(浦) 곳이 있다. 당신과 나는 청포대의 밤바다 앞에 서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우린 새카만 청포대의 밤을 도화지로 삼고, 불빛을 붓으로 삼아서 무언갈 그려보기로 했다.
각자의 휴대전화를 꺼내서 손전등 기능을 켰다. 우리가 허공에 연신 손을 휘둘러가며 그려낸 것은 ‘사랑’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였다. 우리는 그것을 예쁘게 사진으로 담아내기 위해서 촬영을 거듭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내가 지금이곳에서 사랑을 놀이처럼 하고 있는 것인지, 놀이를 사랑처럼 하고 있는 것인지 밤바다의 경계선처럼 헷갈려하기도 했다. 한참을 즐거워하는 우리를 보며, 나의 어떤 그리움은 그곳에 묻어두고 오기도 하였고, 어떤 그리움은 여기서 시작하기도 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우리가 바라는 일들이란 늘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처럼 시작한 일들이 사랑으로 끝나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