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단풍
이제 밥 보다 약을 더 많이 먹는 당신에게
이제 밥 보다 약을 더 많이 먹는 당신에게
이제 밥 보다 약을 더 많이 먹는 당신에게 제가 다녀온 장태산에 대해서 이야기해 드릴까 합니다. 당신은 먼 곳까지 움직이기가 불편하니, 그곳에 직접 다녀온 제가 그 멋졌던 여행에 대해서 생생하게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장태산에 오른 날은 아주 날씨가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비는 한 방울도 오지 않고, 구름도 맑게 개어있었습니다. 단풍도 어찌나 시기적절하게 들었는지 알록달록한 산은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일기예보에 날씨가 흐림으로 나와 있었다거나 올해는 단풍이 늦게 든다고 했다는 말은 너무 믿지 마세요. 예보가 현장과 다른 일은 왕왕 있는 일이 아닙니까. 저는 참 운이 좋았지요. 그러니 당신은 오직 제 이야기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장태산은 대전에 있는 산입니다. 저는 산을 오르기 전, 친구들과 함께 대전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빵이나 국수 같은 것들을 사 먹기도 했습니다. 여기는 밀가루 음식들이 유명한가 봐요. 대전의 가게들은 일요일에 휴무가 많다고 했다던 인터넷의 글은 너무 믿지 마세요. 지방에 있는 상점들이, 관광객이 몰릴 때 휴일도 문을 여는 경우가 왕왕 있지 않습니까. 저는 참 운이 좋았지요. 그러니 당신은 오직 제 이야기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간 친구들도 정말 좋은 아이들입니다. 자기 얼굴은 절대 안 찍는다던 친구가 저와는 같이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고요, 원래 말수가 없이 조용하던 친구가 요즘 들어 제 장난을 잘 받아주기도 합니다. 쑥스러움이 많은 친구와 나이차가 많은 사람들과는 잘 어울려보지 못했다는 친구도 이젠 스스럼없이 저를 대하기도 하고요. 우리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놀잇거리를 잔뜩 챙겨 왔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밤새 그들과 웃고 떠들면서 당신을 생각하는 일을 조금 잊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당신도 저와 함께 장태산의 붉고 노란 단풍들을 보거나, 내려와서 대전의 유명한 빵집이나 국숫집에 들러서 맛있는 것을 먹기도 하고, 머리를 맞대고 챙겨 온 놀이들을 즐기거나 밤새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병원에서 당신이 고문과도 같은 암 검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저는 아직 깨어있지 못한 당신을 옆에 두고 ‘그래도 희망이 있겠죠?’라고 의사 선생님의 옷깃을 잡고 물었습니다. ‘저는 희망 같은 건 안 믿어서요.’라며 제 손을 슬며시 뿌리치며 뒤돌아서던 의사 선생님이 야속했어요. 그러나 제가 여기저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보다 더 심한 암의 전이에도 기적적으로 수술과 재활에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고 해요. 저는 저런 돌팔이 의사의 말보다는 제가 찾아온 이런 귀한 사례들을 더 믿고 싶고요. 우린 참 운이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신도 오직 제 이야기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은 당신이 한 움큼씩 약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면서 떠올리기 싫은 어떤 슬픔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당신이 이제 내 곁을 영영 떠날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들 말입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사랑하는 것들과 언젠가 다 헤어지게 되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조금 멀리서 이별을 시작한다는 말과도 같을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했고, 나 또한 당신을 사랑했으므로 우리가 이별하게 되는 것은 아마 필연적인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별한다는 말이 싫었던 저는 그것을 바꾸어 표현할 말을 찾기 위해서 내내 사전을 뒤적거려 보았습니다. 그러다 ‘작별’이라는 단어를 발견했어요. 작별의 뜻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별은 ‘서로 갈리어 떨어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요. 작별과 이별은 뜻이 서로 비슷한 단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둘 사이에는 마지막 인사가 있고 없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인사도 없는 이별보다는 서로에게 안녕이라고 손을 흔들어 줄 겨를이 있는 작별이 덜 슬픈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을 읽고 난 저는, 어차피 사랑하는 당신과 헤어져서 슬퍼야 한다면 우리 가급적 이별하지 않고 작별했으면 좋겠다는, 이루어지지 않을 그런 꿈같은 걸 꾸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