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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Jan 02. 2024

겨울 묵호

내게 묵호의 아름다움에 관해 처음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오래전에 좋아하던 어떤 미이지만, 오늘 묵호에 온 것은 꼭 그런 옛날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찾아 헤맬 수는 있겠지만 마지막에 잠겨있는 문은 아마 끝내 열지 못할 거라던 말을 짊어지고, 내가 좋아하던 어떤 의 느릿한 걸음이나 나른한 목소리나 다정한 말씨 같은 것을 떠안고, 술 몇 병 손에 들고,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살며시 당기며 묵호에 왔다.


밤은 많은 이야기를 싣고 흘러간다. 묵호의 겨울밤은 더 길어서 우리가 홀로 떠안고 있었던 많은 이야기가 서로에게 흘러갔다. 슬픈 이야기가 흘러가면 슬픈 이가 둘이 되고, 웃긴 이야기가 흘러가면 우스꽝스러운 이가 둘이 되었지만, 위로해 줄 이도 둘, 웃는 이도 둘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묵호의 겨울처럼 깊어 가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다만 어떤 이야기가 흘러가든 쓸쓸한 이가 둘이 되는 일은 없기를, 사랑하는 이는 여럿이 되기를 바랬다.


사람에게 꼬리를 흔들지 않고 그저 제 갈 길을 가는 묵호의 개들이나, 함부로 해를 보여주는 일 없이도 동이 터오는 묵호의 바다처럼 나도 그냥 지금 해야 할 일들을 하기로 했다. 내가 묵호에서 빌었던 새해 소원과는 달리 앞으로도 나는 몇 번은 더 슬프겠지만 그래도 내일 말고 오늘 사랑하기로 했다.


돌아가는 기차를 타는 곳 앞엔 저 끝까지 철길이 놓여있었다. 우리가 지나온 먼 길, 서울에서 동해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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