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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Nov 12. 2024

원주 반계리

우리가 겪은 어떤 일들을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이 세세하게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랑했던 기억이나 슬펐던 기억만이 흐리게 남아있다. 하지만 슬픔도 결국 사랑이므로 우리에겐 끝내 사랑만이 남는다 하겠다.


원주엔 반계리가 있고, 반계리엔 오래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고,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 발치엔 시든 낙엽들이 떨어져 있고, 그 중 몇몇은 다시 사람의 손에 주워 올려진다. 사람들은 제일 샛노란 은행잎을 골라 주워서 머리에 꽂아보기도 하고, 서로의 얼굴에 가져다 대보기도 하고, 나비 모양으로 만들어 보기도 하고, 품에 넣기도 했다. 반계리에 가을이 오기를 기다렸던 이토록 많은 마음들이 거기에 모여있던 것이다.


문득 가을 말고 겨울의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러 오고 싶어졌다. 저 노란 잎이 다 지고, 사람들은 떠나가고, 앙상궂은 가지만이 남아있고, 그 위로 겨울 눈이 솜꽃처럼 앉아 있는 그런 은행나무와 마주하고 싶어진 것이다. 나는 금빛 은행나무 아래 사람들의 눈에서 설레는 마음을 읽었고, 그것으로 내년 가을에도 사람들이 같은 눈빛을 품고 여기에 모이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처연하고 가만해진 은행나무를 만나고 싶은 나는, 내가 겨울 반계리로 또 오게 되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원주엔 반계리가 있고, 반계리엔 오래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고,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 틈바구니엔 이미 다 시들어버린 행복을 쥐고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먼 훗날 그저 사랑만이 남을 사람들 또한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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