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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록 Jul 03. 2022

마이 스토리1 - 말 없던 아이가 임금님 대사를 외쳤다

말이 없는 아이로 몇 년을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언어가 내 안에 쌓이는데 입은 도무지 열리지가 않아 미소 띤 입과 어쩔 줄 모르는 눈빛으로 적어도 10년은 산 것 같아요.


수업 시간에 책을 낭독하거나 숙제 발표를 해야 해서 말을 할 때 얼굴과 귀와 목과 아마도 두피까지 모두 빨개진 채 왕왕거리는 정신으로 낯선 내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아주 여러 번 있어요.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수업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교과서에 나온 연극 대본을 낭독하기로 했고 손을 든 아이에게 기회가 있다고 했어요. 친구들은 손을 높이 높이 들며 "저 임금님이요!", "저 왕자요!"하고 소리쳤고 원하는 역할의 대사를 읽어나갔어요.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왜 저렇게 읽을까? 연극인데? 진짜 말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어요. 심장이 쿵쾅거려서 자리에 편안히 앉아있기가 힘들었어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얼굴과 목과 귀와 두피가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어요. 


'나하고 싶은가 봐...'


당황스러웠어요. 말도 잘 못 하는데 무슨 대사를... 하지만 근엄한 목소리로 크게 호통치는 임금님의 말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 말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온몸에 가득했어요. 


소심하게 올린 손을 선생님이 보시고 저의 이름을 부르셨어요.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빨개진 몸이 불타오르도록 임금님의 말을 했어요. 큰 소리로, 리얼하게, 과장되게. 


이 말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극 중의 임금님이니까 실컷 소리를 칠 수 있어 좋았어요.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렸지만 마음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시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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