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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Oct 30. 2022

마침내, 존재의 바코드

'그럴 수도 있는' 영역으로



지난 회사에서는 화장실 갈 시간도 아껴갈 만큼 일에 치여 소위 말하는 '월루'를 행해본 적이 극히 드물다. 꼭 월급루팡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업무 사이사이 숨을 쉬게 해주는 공백을 갖고 싶은 것은 모든 직장인들의 바람일 터. 새로 옮긴 회사는 다행히도 한 뼘의 공백을 허락해 주는 곳이다. 매일 아침 로비에서 구독하는 신문을 받아 들고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운이 좋게도 오전 업무 중 커피 한 잔을 내려마시면서 신문을 훑어보는 여유가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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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사의 운명'이라는 칼럼을 읽었다. (오은 시인 / 경향신문 21.02.25)


-삶을 이끄는 것은 동사지만, 삶의 곳곳에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은 부사 같다.


"나는 네가 좋아"보다 "나는 네가 정말 좋아"라는 말이 더욱 강력한 것처럼 말이다... (중략)... 생의 마지막에 만날 부사가 '결국'이 아닌 '마침내' 이 기를 바란다.


결국은 닥치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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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침내 살아남았다. 과연 마침내 쓰고 싶은 문장이 어떤 문장 일지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이 문장이 떠올랐다. 요새 나에게 가장 큰 화두는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적자생존의 문제가 아닌 존립의 문제이다. 참된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싸움이다. 나의 정체성은 잘못 만든 바코드처럼 모호하다. 검고 흰 줄무늬들은 길이가 일정하지도 않고, 색이 명확하지도 않다. 군데군데 검은색이 까져있어 흰색에 가까워진 부분이거나, 흰색이라 하기엔 거무죽죽한 회색에 가까운 부분도 있다.

정체성이라는 바코드는 세상을 인식하게 해주는 자료이며, 스스로를 나타내는 표식이다. 이것은 굳이 남들보다 뛰어날 필요도 없다. 단지, 식별을 가능하게 해 주면 된다. 남들과 다른 경계선이자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이러한 존재가 점멸하는 신호등처럼 가변적일 때 혼란을 느낀다. 어느 날은 응당 살아있어야 할 존재가 되었다가, 어느 날에는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갖는다.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은 욕구는 이미 버린 지 오래이다. 그저 숨만 쉬더라도 세상에 마음 편히 숨 쉬며 살아남고 싶다. 문자 그대로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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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오늘도 고민한다. 우선 오늘은 수요일이기 때문에 아파트 분리수거를 해야만 했다. 식당에 가면 물을 주고 기본 반찬을 내오는 것처럼,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기본과도 같은 일들이 존재한다. 대체로 그 일들은 단순해 보여도 빼먹는 순간 무너지는 젠가처럼 삶을 어지럽힌다. 그리하여 아무리 기력이 없어도 없는 기운도 끌어모아 나가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플라스틱, 종이, 음료수 캔 따위를 사람들과 뒤섞여 분리하다 보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혼자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아직 남들과 똑같이 이런 일들을 해내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스스로의 존재가 꼭 타인과 같은 기준선에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남들보다 뛰어날 필요도 없지만, 남들과 같아질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이때의 '똑같다'라는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해놓은 대열을 이탈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의미의 동일함이 아니다. 다수 속에 속해서 우위를 선점했다는 안도감을 느끼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외롭지 않고 싶었다. 칼럼처럼 부사를 넣어 말해보자면, 단지 정말 외롭지 않고 싶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들이 당연한 것이라, 절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남들처럼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영역에서 살아 숨 쉬는 게 가능하다고. 그저 그럴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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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럴 수도 있는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 모든 예외가 허용되는 곳.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고 싶었다. 예외 따윈 없어서 어떤 바코드로도 누구나 인식이 가능한 세상. 밥 먹듯 먹는 자기 비하와 이불처럼 덮고 자는 자기혐오를 하더라도 언제든 살아가도 된다고 말해주는 곳. 힘들 때 마음껏 힘들어하지 못하고 날이 선 죄책감으로 상처까지 찌르는 대신에 시간을 두고 기다려주는 곳이 필요했다.


끝없는 야근에 겨우 3시간을 자고 출근을 하면 다시 또 어김없이 야근이 계속 이어지는 날들이 있었다. 쏟아지는 피로에 밥보다 잠이 더 중요해 밥을 포기하고 점심시간에 휴식을 택한 적도 많다. 그러다 보면 하루에 밥은 고사하고 겨우 커피 한 잔을 섭취한 것이 끼니의 전부인 적도 있다. 이때에 밥다운 밥을 먹고, 잠 다운 잠을 자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근본적 소임이라 느꼈다. 정신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스스로를 의심하느라 불면하지 않고, 밥을 넘기지 못해선 안된다.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보이는 상황이 힘들 때에는 쉽게 동조해 주지만, 드러나지 않는 문제들은 쉬이 인정하지 못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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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렇게 살아남는 것이 이다지도 어려운 이유는 나의 바코드는 인식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서 한없이 약해지곤 한다. 때로는 악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존재를 부정하는 질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팔이 부러지거나, 피부가 벗겨지거나, 눈이 충혈되거나 인과관계를 비교적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하는 반면, 어떤 일들은 우연처럼 일어나기도 한다. 우울함의 촉발은 굳이 따지자면 우연에 가깝다. 물론 전문가와 함께 따지고 들자면 인과관계를 규명할 수도 있는 부분도 존재한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복잡한 우연들이 겹쳐져 만들어진 영역도 존재한다.

행복하다는 감정은 어떠한 부가 설명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행복은 행복 그 자체로 설명할 지점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울하다는 감정도 어떠한 부가 설명을 붙이기가 어려울 때가 반드시 있다. 도대체 왜 우울하냐고 묻는 질문은 존재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가여운지 알면서도 자꾸 애쓰는 것이다. 약을 먹는다고 해서 내가 이상한 건 아냐.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이런 일 때문에 우울한 것 같긴 해.


늘 설득하려 하고 증명하려 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모호한 것 중 가장 두려움을 주는 것은 감정이다. 모호하다고 해서 틀린 것인지 묻고 싶다. 과연 모든 것들이 명확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도.


존재의 바코드가 마침내 의심 없이 찍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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