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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Oct 27. 2024

덕질을 권하노라

내 최초의 덕질은 장국영이었다.

천녀유혼, 영웅본색에 나오는 여리여리한 미소년 오빠는 내 상상 속 첫 커리어를 통역사로 점지해 주었다.

평범한 이웃나라 청소년이 어디서 대스타를 만나겠어요. 한쿡에 행사 온 오빠의 통역을 담당하다 사랑에 빠지는 뻔한 스토리 한번씩은 다 써봤잖아요.

테이프가 닳도록 스탑과 리버스를 눌러가며 깝쫑쌉모이 소리가 나는 광둥어를 한국어로 따라 쓰며 외웠던 영웅본색 ost는 나의 단기기억력과 언어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주었다.

그렇게 중학생이던 나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조잡한 그림의 편지지들을 사 모으며 꿈을 키우다 90년 아비정전을 보고 하이틴 스타에서 아티스트가 되어버린 오빠를 떠나보냈다. 말랑달콤한 멜로 속 주인공 캐릭터를 좋아했던 것이지 그 아픔까지 사랑할 수는 없겠어...라며.

그리고 대학교를 입학하던 어느 해였던가... 졸업하던 어느 해였던가... 헛되고 헛되도다 하면서 한 상자 가득 모아두었던 그의 사진이 바탕에 깔린 한 장도 쓰지 못한 편지지 굿즈 상자를 버렸다.

원래 굿즈는 그런 거잖아요. 

스티커인데 붙이지 않음.

볼펜인데 쓰지 않음.

부채인데 부치지 않음.

노트인데 쓰지 않음.

(어린 나이에도 뭘 알았네, 내가...)

그리고 그때의 깨달음으로 예쁜 쓰레기는 사지 않는다. 소년단 덕질을 하면서도 공연 티켓과 관련 전시, 음반 말고 예쁘고 귀여우면서 내 기준에 쓸모없는 굿즈는 사지 않는다. 덕질로 미니멀라이프를 배우다. SWAG!

대학원생이던 어느 해에는 자니즈 주니어 덕질을 하며 20대 말에 20대 초반 어린 동생들과 덕질 친구가 되어 팬픽을 쓰고 놀기도 했고. 여자보다 예쁜 남자 아이돌 덕질은 외모 가꾸기에 영 관심이 없던 나에게 남자보다 못 생기면 어떻게 하지요? 최소한 가진 것은 좀 갈고 닦으면서 살자,라는 각성이 아주 가끔 아주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효과가 있다.

그 후로는 연애와 결혼과 출산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휴덕의 길을 갔지만 하지만 여전히 잘생긴 배우 혹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에 듬뿍 애정을 주며 금세 사랑에 빠졌다가 드라마가 끝나면 금세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전천후 금사빠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2017년 가을, 덕후로서의 나를 각성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름부터 촌스러워서 쳐다보지도 않던 그룹, 랩 몬스터라는 예명에 더 고개를 짤짤 흔들었던 그 방탄소년단이라는 그룹이 뭔 빌보드에서 상을 탔네, AMAs에서 퍼포먼스를 하네,하는 뉴스가 들리는데 JYP가 원더걸스를 미국에 진출시켜보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들어왔던 나로서는 너무나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던거지.

대한민국 3대 메이저도 못한 걸 어떻게? 

그리고 유튜브에서 '방탄소년단'을 검색하는 순간 게임은 끝난거죠.

지금 유튜브로 가서 그 키워드 치려는 분들 그 손을 내려놓으시오~ 더 이상의 입덕은 참아주시오~ 이미 충분히 포도알 따기가 힘드오~

이때까지는 그냥 대충 덕질의 역사라면 지금부터는 내 기준에서 매우 열심히 오래 빠져서 하는 덕질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 전까지는 우리 회사의 제품을 사랑하는 덕후들의 마음을 몰랐다. 극성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내가 덕후가 되어보니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이해되고 그들의 사랑이 너무 감사한 것이다. 여러분 덕질을 하세요. 고객님을 사랑하는 직원이 될 수 있습니다. 면접관 여러분, 덕후를 뽑으세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할 거예요. 덕질 해야하니까~

신방과 대학원을 나오고 저널리즘 관련 논문을 쓰고 석사를 받았어도 끄고 살았던 감각이 덕질을 하면서 쨍하게 살아난다. 마치 방금 비벼 날카롭게 감각을 벼려놓은 개미의 더듬이 같이 말이다.

문자가 활자화되면 뭔가 권위를 가지고 사실인 것 같은 착각을 주는데 언론의 글은 그 언론사와 그들이 비호하는 세력의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쓰여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던 가르침이, 일본 우익의 티셔츠 조작 앞에 놀아나는 가디언지 일본 특파원의 논조를 그대로 받아쓰는 국내 신문의 안일함 앞에 분노로 되살아난다.

덕질을 하다보면 SNS의 수혜와 폐해를 가장 첨예하게 겪게 된다.

누구보다 빠르게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연예 기자들도 트위터에 상주하고 있다가 받아쓸 정도니까. 그렇지만 잘못된 정보도 빠르게 바이럴될 수 있고 그것이 역풍을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겪게 된다. 그런 일을 덕질을 하면서 몇 번 겪게 되면 새로 접한 사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팩트 체크를 하게 된다. JTBC가 그걸로 흥하고 그걸로 거시기한 바로 그 팩트 체크. 그게 누구에게서 나온 정보인가, 믿을 만한 정보원인가, 이 주장이 과연 그런 면만 있는가. 다르게 생각할 수는 없는가. 약간 언론인 훈련 같지 않아요? 

덕후가 되어보지 않고 언론을 논하지 말라.(뭐랰ㅋㅋㅋ)

덕질을 하다보면 미디어의 보도 이면을 알게 되고 언론 플레이가 끝난 후 모두에게 잊혀지는 사건의 전반에 대해 끝까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찢어진 신문지 같은 기억으로 잘못된 키워드만 기억하며 사는 머글들이 얼마나 많게요? 빠순이라고 욕하지 맙시다. 세상은 당신들이 욕하는 덕후들이 바꿉니다.

프로듀스 101 시리즈 팬들이 부정투표라고 의혹 제기할 때 뭐라 그랬어? 니가 응원하는 연습생이 데뷔 못했다고 추하게 군다고 그랬잖아. 근데 결과 어땠어? 사실이었잖아. 덕후들이 시끄럽게 굴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세요. 다시 한번 뭐라고요? 세상은 덕후들이 바꾼다.

덕질을 하다보면 글을 아주 찬찬히 눈에 불을 켜고 읽게 된다.

소속사에서 행간에 아주 많은 의미를 담은 글을 게시하거든. 그래서 우리는 '사실무근이다'라고 할 때와 '정해진 것이 없다'의 차이를 안다. 콘서트 한 번 가려면 얼마나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놓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를거야. 유료 팬 클럽에 가입한 후 그걸 어느 사이트에서 인증한 후 언제부터 언제까지 콘서트 응모를 한 후 언제 결과가 나오고 언제 티켓을 에매해야 하는지. 무엇은 본인 확인 서류로 쓸 수 있고 무엇은 인정되지 않는지. 제대로 독해하지 못하면? 콘서트에 못 간다. 아주 치명적인 결과지. 한 번 당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구.

근데 그게 방탄처럼 글로벌한 스케일로 일어나면 영어와 일어로도 그걸 읽어야 해. 내가 그럴 능력이 없으면 하다못해 구글 번역기라도 잘 다루게 되고 그걸 번역해서 알려줄 능력자들을 찾아서 친하게 지내는 방법도 찾아내게 되지.  수능 국어 지문, 토익 영어 지문으로 출제 한번 해보라고. 정답률 얼마나 나올지 궁금하다고. 지금 누가 누구를 덕후라고 무시하냐고.

약 3년 간 방탄의 모든 공개된 일정과 음악 컨셉과 작업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다보니 뭔가 세상의 이치를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 저런 걸 다 알지? 나는 모르는데... 싶어서 쪼그라들었던 많은 지식들에 대해 내가 방탄에 기울이는 정성처럼만 기울이면 나도 세법 전문가, 토지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든다고. 물론~ 내가 세법과 토지 용도와 재건축 절차에 대해 방탄에 대해 가지는 것 같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수 있는지는 다음 문제지만. 흠흠.

덕질을 하다 보면 아주 많은 덕후들의 다양한 재능에 감사하게 된다.

동영상 편집을 잘 하는 팬, 팬 아트를 잘 하는 팬, 번역을 잘 하는 팬, 모든 자료를 아카이빙해서 정리하고 공유하는 팬, 누구보다 빨리 소식을 물어오는 팬, 누구보다 티켓팅을 잘하는 팬, 모두 다 소중한 덕질 메이트고 그 모든 재능이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러다보면 책 읽는 거 싫어하는 내 아이도 생긴 그대로를 인정하게 된다! 그래, 너도 잘 하는 게 있잖아, 그걸 더 열심히 하렴, 이런 마인드가 된다고. 여러분 덕질을 하세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네, 저는 가능성을 말하는 거예요. 제가 좋은 부모다~라고는 말 모대~)

요즘 우리집에 나루토 새싹 덕후가 한 분 자라고 계신데 입만 열면 나루토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처음엔 뭔 소린가~ 하다가 이제는 매우 열심히 들어주고 제대로 된 덕후가 되어보라고 북돋아 주고 있다. 그래 그런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을 동력삼아 열심히 달려보렴 너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엄마 봐봐, 콘서트 보러 미쿡도 간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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