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미국에서 5년 동안 살면서 굳어진 인생철학들이 있다. 그것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자
의미 없는 시간은 없다
이다. 내가 이런 철학들을 가지게 된 배경이 각자 있다. 아니 아마 철학과 깨달음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거의 21살 때부터 나는 홀로 미국으로 와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다. 처음이었다. 가족들과 떨어져 산건. 20년 동안 부모님의 품 안에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사실 편했다. 잘못된 점이 있으면 부모님이 고쳐주고, 고민거리가 있으면 언제든지 들어주었다. 외로울 일도 없었다. 한집에 4명이서 모여사니 말이다. 하지만 안 좋은 점도 있었다. 집에서는 부모님의 눈치를 많이 본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항상 성실하고 모범적인 모습을 기대하기에 노는 것이 눈치 보였다. 항상 억지로라도 공부하는 척을 해야 했고,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해야만 했다. 우리 집은 친구들과 외박하는 것이 금지되어 항상 막차시간 때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스물한 살 때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살아보니 사실 좋았다. 뭔가 독립한 기분도 들고 나한테 눈치 주고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집에 가족들과 같이 살 땐 통금시간이 있어서 친구들과 늦은 시간까지 놀지 못했지만 미국에서는 통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스무 살 초반의 활기까지 더해지니 나를 막을 자는 없었다. 항상 술 마시고 그다음 날에 돌아왔다. 방 안에서 공부하는 척을 할 필요도 없었다. 공부할 땐 하고 쉴 땐 제대로 쉬었다. 정말 그때는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놀았던 것 같다.
하지만 놀 것을 다 놀고 시간이 지나다 보니 독립의 단점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항상 행복한 일만 있을 순 없다. 슬픈 일도 있을 것이고 괴로운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가까운 친구나 지인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곤 했지만 그 사람들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친구와 가족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친구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고민이 있고, 가족에게만 이야기할 수 있는 고민이 있다. 가족과 떨어져 살다 보니 나는 가족들에게 내 고민을 거의 털어놓지 못했다. 안 그래도 머나먼 타지에서 걱정하실 텐데 다른 걱정거리를 더해줄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잘 지내는 척을 했다. 그리고 그런 고민들은 항상 나 혼자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 혼자서 생각하고 나 혼자서 이겨내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철학들은 그렇게 나 혼자서 고민하고 생각하다가 나온 것들이다.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스무 살 이전까지는 이 말이 와닿지 않을 수 있다. 보통은 부모님 밑에서 살고, 부모님들이 선택을 대신해주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스무 살이 지나고 '어른'이 되면 달라진다. 부모님이 대신 선택을 해주는 시기가 지나고 자기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가 온다. 그러고 온전히 책임은 자신의 것이다. 그렇다.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인생의 수많은 선택들을 나 혼자서 해야 한다니, 정말 가혹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당장 미국 유학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부터 큰 시련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 대학을 목표로 해왔고, 한국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당연시되어왔다. 고3 때 힘들게 수능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캠퍼스 로망을 꿈꾸면서 고난을 버텨내곤 했었다. 드라마, 웹툰, 등을 보면서 캠퍼스 라이프에 대한 로망이 점점 커져갔다. 그러고 꼭 좋은 대학교를 가서 재밌게 노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수능이 망하고 나는 재수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때 딱 부모님이 제안을 걸어온 것이다. 미국 유학을 가지 않겠느냐고.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나는 결국 미국행을 택했다. 도저히 재수를 할 자신이 없었다. 1년 동안 고3 생활을 다시 하라니. 나의 의지력이 부족해서 중도에 포기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미국을 가기로 했다. 거기에서 나는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다. 친구들이 대학에서 이십 대 청춘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학원 같은 대학교에 박혀서 공부를 했다. 물론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열심히 놀았다. 위에서 쓴 것처럼 나를 통제하는 사람이 없으니 고삐 풀린 망나니처럼 놀러 다녔다.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가고, 학점이란 것이 생기고, 목표가 생기니 더 이상 그렇게 놀 수만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편입을 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학점을 받아야 했고, 그 외의 활동도 열심히 해야 했다.
나는 억울했다. 왜 내 친구들은 모두 재밌는 추억을 쌓고 잘 노는 것 같은데 나는 이 먼 곳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가. 공부가 힘들고 삶이 고달플 때마다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아 그냥 성적에 맞춰서 아무 대학이나 들어갈걸. 그럼 나도 지금쯤 재밌게 놀고 있을 텐데. 아님 한국에서 재수생활을 열심히 했다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큰 틀에서 후회를 해버리니 나의 사소한 선택까지도 모두 후회를 해버리게 된다.
"아 이 학교를 선택하지 말걸... 여기는 캘리포니아 북부에 있어서 한인식당도 많이 없고... 노숙자도 많고.."
" 한국 친구를 사귀지 말고 외국 친구만 사귈걸.. 그랬다면 지금보다 영어 실력이 훨씬 늘었을 텐데.."
그러다 보니 자존감도 떨어지고 그냥 우울해 지기만 할 뿐이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때 한 형은 나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
"어쩌피 네가 후회해봤자 변하는 건 없어. 네가 선택한 길이잖아. 너를 믿고 그냥 한번 가봐."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시간을 보낸 게 아까워서라도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리고 후회는 나를 계속 옭아맬 뿐이었다.
그때 내가 서울에서 인턴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어리숙했던 나는 인턴 생활을 하면서 많이 혼났었다. 그때마다 나는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었다. 그때 나의 사수였던 과장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죄송합니다'는 과거 지향적이니까 듣기에 안 좋아. 차라리 '앞으로 잘하겠습니다'라고 해. 그것이 미래 지향적이고 좋잖아."
당시에 나는 이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어떻게 사과를 하든 똑같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문장은 완전히 다른 문장이었다. 마인드의 차이였다. 과거 속에 갇혀 사느냐 혹은 미래를 바라볼 것이냐의 차이였다.
후회를 하는 것은 과거 속에 갇혀 사는 행위이다. 자책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과거에 가두고 미래를 못 보게 하는 행위와 같다.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전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전진하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이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과거의 틀을 깨고 나와 전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나의 공부를 방해하는 요소가 사라지고 마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그렇게 나는 계속 전진해 나갔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사람은 모두 똑같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말한다. 주어진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고. 맞는 말이다. 누구는 똑같은 시간에 놀고 있고, 누구는 똑같은 시간에 한 가지 목표에 집중을 하면 분명 그 차이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성공하려면 최대한 노는 시간을 줄여야 할까? 반대로, 열심히 노력했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 시간들은 의미 없는 시간들이 될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이 세상에 의미 없는 시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특정한 시간에 무엇을 하든 그 행위는 분명 목적성이 있을 것이다. 목적성이 없는 행위는 없다. 예를 들어 내가 방에서 하루 종일 핸드폰만 했다고 쳐보자. 그 행위는 시간낭비일까? 시간낭비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핸드폰을 했던 시간은 분명 의미가 있다. 핸드폰을 하면서 휴식을 취했을 수도 있고 많은 정보들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내 목표와 부합하지 않더라도 시간을 보내면서 분명 얻어가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시간낭비를 한 적이 굉장히 많았다. 아니 많았다고 생각했었다. 집에 있는 것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활동적인 것을 잘 안 하게 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혼자 있을 때는 그냥 책 읽고, 티비보고, 컴퓨터 하고 핸드폰을 쳐다보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괜찮았다. 내가 원하는 방식의 휴식이니까. 코로나가 터진 직후 나는 방구석에서 폐인 생활을 했었다. 밖에는 코로나와 인종차별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고, 내가 살아남을 방법은 그저 최대한 집 안에 있는 것이었다. 학기 때는 그나마 공부할 것이 있으니 괜찮았지만, 방학 때가 압권이었다. 정말 할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컴퓨터 하고 핸드폰 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맘껏 해야지 라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한 달 동안 그렇게 살다 보니 정말 못할 짓이었다. 맨날 게임하고 누워있고를 반복하다 보니까 정말 인생을 낭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빨리 학기가 시작하기를 바랄 정도였다.
학기가 시작하고 나니 공부가 재밌어졌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햇빛만 봐도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행복했다. 사소한 일상 하나하나가 되살아 나고 나는 색다름을 느꼈다. 내가 이런 일상을 누릴 수 있음에 기뻐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게이머 생활을 했던 근 한 달간의 시간이 마냥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시간을 보내고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만나기만 해도 재밌고, 집 밖을 나가도 그냥 좋았다. 소소한 행복이란 것이 뭔지 깨달았다. 내가 만약 이런 생활을 해보지 않았다면,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또 내가 집에 틀어 박혀서 게임만 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살면서 얼마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그때 무기력하게 보냈던 하루하루가 결국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노력을 했는데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지금까지 노력에 쏟아부었던 시간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편입생이고 나도 목표를 가지고 공부했었다. 내 주변도 똑같다. 편입 결과가 나오면 주변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목표를 이룬 자, 목표를 이루지 못한 자. 목표를 이룬 자는 환호하며 기뻐하지만 반대쪽 사람들은 크나큰 낙심에 빠진다. 편입 공부를 2년 동안 했음에도 실패하니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2년 동안 공부를 했던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2년 동안 공부한 것도 많을 테고 분명 깨닫고 얻은 것도 많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니까. 결과는 내 생각과 다를 수 있지만 분명한 건 '나'는 그대로다. 그리고 분명 실패를 하면서 깨닫는 것도 있다. 자아성찰을 하게 되고 그때보다 더욱 발전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기에 2년 동안 공부한 시간은 절대 헛된 것이 아니다.
연애도 똑같다. 2년 동안 연애를 했다가 헤어져도, 연애를 했던 기간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기간 동안 나 스스로 성장한 것도 있을 것이고, 연애를 하면서 배운 것도 분명 많을 것이다. 상대방이 비록 똥차였다 하더라도 배운 것이 있을 것이다. 다음부터 그런 똥차를 만나지 않는 스킬이 생겼을 테니까. 내 젊은 시절을 그 사람에게 낭비했다고 표헌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분명 그 기간 동안 자신은 많이 성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배운 것을 토대로 자신은 더욱 성장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결국에는 모두 생각하기 나름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쭉 부정적으로 살게 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의미 없는 시간도 의미 있게 된다. 위의 글들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자신의 성장하려는 의지이다. 힘든 시간을 겪고 자신이 성장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결국 그 시간들은 의미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의미 없는 시간이어도 자신이 그 속에서 배울 점을 찾고 어떻게든 발전시키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그 시간은 결국 의미를 갖게 된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시간이 좋은 시간이었던 나쁜 시간이었던 지나가면 결국 과거가 된다. 지나간 과거에 자신을 옭아매면 결국 힘들어지는 것은 자신이다. 과거는 그만 보내 주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