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영화감독 역할이 등장하고, 권해효 배우가 연기했다. 그와 실제 부부 관계인 조윤희 배우가 <그 후> 때와 마찬가지로 와이프 역할을 맡았고, 이혜영 배우가 글쓰기를 멈추고 있는 유명 소설가로 등장한다. 우연히 셋이 만나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남편의 영화가 맑아졌다는 칭찬을 하자 소설가가 코웃음을 친다. 늙어서 여유가 생긴 게 아니라 다 가지고 나니 편해지고 싶은 거겠지,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었고 이제 다 가졌으니까 그런 거면서 무슨 맑음을 이야기하냐며 냉소한다. 이후 함께 산책을 하다가 작품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 유명 배우(김민희)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감독은 그녀를 칭찬한답시고 흔히들 이야기하는 '아깝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자 소설가는 '어린 애도 아니고 자기 인생 자기가 선택해서 사는 건데 뭐가 아깝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일갈한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적당히 웃어 넘기는 법 없이 감독과 있었던 과거의 일, 감독의 가치관, 자신과 배우에 대한 칭찬 표현 하나하나 기어코 할 말을 다하고, 결국 감독 부부가 언짢아하며 먼저 자리를 떠나게 만든다.
다소 신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실이 투영되어 재밌는 부분이었다. 언젠가부터 홍상수 영화에 대해 '맑다'는 평이 많아지고 있고, 나 역시 <강변호텔>을 본 이후에 '늙어간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었다. 치기 어린 젊음의 시기를 지나 중년이 된 아들과 늙은 아버지의 관계, 죽음 같은 주제를 다루며 담백해지는 것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니, 자신이 달라졌다는 대중의 평가나 스스로의 예술에 대해 냉소하는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어쩌면 그냥 살다보니 시간이 오래 흘렀고, 안정의 시기에 이르러 편해진 걸지도 모른다. 유시민 작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젊은이들은 스스로 답을 찾아야지 기성세대에게 답을 요구해선 안된다. 덧없다는 말에 속지말아야 한다. 어차피 그들은 이미 열등감과 치열함을 다 겪어내면서 젊은 시절 가지려했던 것들을 다 가져버렸다. 그러니 더이상 박찬욱의 인물들은 복수에 혈안이 되어 광기를 드러내지 않고, 홍상수의 인물들은 여자와 한 번 자보려고 애쓰지 않는다.
부부와 헤어진 소설가는 이후 배우와 동행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밥도 먹고, 책방에서 술도 마신다. 소설가가 자신이 요새 글을 잘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배우에게 털어놓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작은 것을 부풀리고 과장하게 되는 것 같아 싫다고 고백한다. 자긴 서사가 강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어서, 어렸을 때야 이런 예민함으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특권이라고 여겨져 좋았지만 지금은 그것이 허망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몇 십 년 알고 지낸 사람에겐 결코 하지 않던 말, 쿨한 척 모르겠다며 웃어 넘길 주제에 대해 가장 낯선 이에게 깊은 마음을 꺼내어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독에게 그녀가 했던 말과 오버랩되어 자기도 편해진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고통이 주던 절망과 희망의 양면이 옅어지고 적당히 편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거겠지, 유명한 글을 써서 인기도 명성도 얻었고 돈도 많이 벌었을테니까. 이제 더이상 고통에 심취하며 그럴듯한 의미를 굳이 부여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삶이 살 만해진 거겠지, 하고. 그래도 적어도 감독과 달리 그녀는 그러한 자신을 달관이나 맑음 같은 것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과장으로 예술을 채우지 않으려 차라리 글을 쓰기를 멈추었다.
잠깐의 만남 뒤 가려는 소설가를 어렵게 붙잡고 수줍게 팬이라고 말하던 젊은이는, 다시 술자리에서 만났을 때 다른 예술가인 시인을 만나서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소설가는 그걸 보면서 코웃음을 친다. 나이 든 예술가를 동경하는 젊은이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운좋게 살아남아 인기도 명예도 돈도 얻었고, 이제는 덕분에 편하게 예술하고 사는 것 뿐이라고. 막연히 동경하지 말고 네 삶을 살라고. 저 젊은이에게 내 모습이 투영되어, 그게 싫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리라. 수어를 배우는 아름다운 장면보다도 이런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았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소설가의 후배인 책방주인은 소설가가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 젊은이에게 '책방에서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잘못을 이유로 고래고래 그녀를 나무란다. 성공한 배우인 길수에게는 책방주인이 굉장히 상냥하고 사려깊으며, 공부 많이 한 지혜로운 예술인으로 여겨지지만, 소설가는 이미 후배가 자기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았다. 또 오랜 시간 각별한 인연이었던 자신에게는 연락하지 않으면서도 이제 막 알게 된 사람들로부터는 좋은 평판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본다.
소설가는 배우에게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찍어보자고 제안하면서 자신의 창작관을 설명한다. 사람이 먼저 정해져야 글이 써진다며, 아주 가까운 사람들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진짜같이 자연스러운 이야기, 하지만 분명히 진짜가 아닌 것, 그런 것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와 흡사하지만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분명히 픽션인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 감독은 실제로도 이러한 방식으로 창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영화에서도 실제 부부인 배우들이 부부 역할로 출연하는 것이나, 김민희 배우를 둘러싼 재능이 아깝다는 세간의 말들, 감독의 영화에 대한 평가 등이 투영되어있다.
길수는 남편과 다정한 듯 하지만, 끝내 화면에는 남편이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가의 영화 속에서도 어머니처럼 보이는 중년 여성과 행복한 때를 보내는 길수가 존재할 따름이다. 꽃을 들고 '신부입장'을 외치며 수수하게 웃어보이는 그녀를 찍고 있는 카메라 뒤 남성의 목소리는 남편의 것인 것 같기는 하다(홍상수 감독의 목소리다.) 꽃의 색이 담기지 않아 아쉬워하는 그녀를 위해, 흑백이던 영화에 잠시 유일하게 색이 덧입혀져 형형한 꽃의 색이 담긴다. 기존 영화에 비해 노출이 높은 카메라 기법으로 찍힌 영상 속에서 어머니처럼 보이는 이와 그녀가 저멀리 계단을 오르며 하얀 풍경 속으로 사라질 듯 멀어져간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절절하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남편은 영화를 보러 동행하지 않았고, 결국 진짜 같지만 허구였던 영화는 끝나버린다. 엔딩크레딧이 오른 후에 장면이 다시 이어진다. 아마 우리처럼 엔딩크레딧을 본 뒤 영화관 밖으로 나왔을 그녀를 기다리는 이가 아무도 없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그녀가 어딘가로 향해 가는 것을 따라가지 않고 영화는 끝이 난다.
수많은 우연과 얽힌 인연들, 미묘한 감정선, 다정한 고백과 서로에 대한 염려, 작은 것을 귀하게 대하는 태도, 보고 듣고 먹고 잠드는 소박한 일상의 아름다움, 동시에 삶과 예술의 불완전성이 다채롭게 담긴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니 느긋한 한낮의 오후 네 시 무렵. 오래된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를 먹고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한적한 골목을 한동안 걸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