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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n 04. 2023

여름 이야기(A Summer's Tale, 1998)

스스로와 불화하는 청춘에 대한 기록

   영화 <여름 이야기, 1998>는 여름 휴가를 떠난 한 남자가 세 명의 여자와 얽히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가스파르는 여자친구인 레나와 함께 ‘웨상 섬’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기로 계획하고, 근처에 며칠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린다. 레나가 아무런 연락이 없어 기다리던 중 식당에서 일하는 마고와 친구가 되고, 거의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만약 레나가 오지 않을 경우 마고와 함께 웨상 섬에 가기로 약속한다. 한편 그와 동시에 마고의 친구 솔렌느에게 매력을 느끼는데, 그녀 역시 함께 웨상 섬에 가자고 제안하고 가스파르는 얼떨결에 동의한다. 그러던 중 뒤늦게 레나가 도착하게 되면서 세 여자 중 누구와 ‘웨상 섬’에 갈 것인가 고민에 빠진다.


   <여름 이야기>는 만들어진 지 20년 이상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립영화관에서 재상영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는 영화로, 에릭 로메르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나는 이 감독의 작품을 접하게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인데, 과연 최근 만들어졌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세련된 색감과 촬영 기법, 입체적인 네 명의 캐릭터 등 여러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사랑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가진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이야기를 두 가지 버전으로 해석해보면서, 좋은 이야기의 조건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이 줄거리에서 표층적으로 드러나듯, 해당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관점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가스파르는 세 명의 여자 중 유일하게 마고와 있을 때만 가장 솔직하게 자신의 결핍을 내보이고 그럴 때 가장 편안해보이는데, 이는 솔렌느나 레나와 있을 때 조급해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가스파르 역시 이를 알고 있어, 마고에게 ‘나를 나답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점은, 가스파르는 세 명의 여자 중 마고에 대해서는 ‘친구’라는 안정적인 관계를 확정지어 놓고, 솔렌느와 레나와 관련해서만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한다는 점이다. 결국 솔렌느와 레나 그 누구도 선택하지 못하고 다른 개인적인 용무를 핑계 삼아 휴가지를 떠나기로 결심한 뒤 마지막으로 마고와 대화할 때 ‘이제 (사랑을 선택하지 않기로 했으니 친구인) 너와 함께 웨상 섬에 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마고는 헤어진 남자친구와 연락이 닿아 이제는 그럴 수 없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마지막만큼은 솔직하고 싶다며 가스파르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춘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고백에 담긴 것보다 더 깊은 사랑이 뭐가 있을까. 가스파르는 영화 내내 사랑을 찾아 헤매는 상처받은 영혼인 것처럼 행동하다가 솔렌느와 레나 누구도 선택하지 못한 채 도망친다. 휴가지를 떠나는 배에 올라타 마고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은 채 점점 멀어지는, 어쩐지 조금 초라해보이는 가스파르의 모습을 배경으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아마 그가 먼 훗날, 친구라는 핑계 뒤에 숨지 않고도 상대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내면을 갖게 된다면, 그가 정말 사랑했어야 하는 사람은 마고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한편 이 줄거리에 대한 이면적인 해석의 관점에서, 인생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선택은 부담스럽다. 내가 무엇을 선택함으로써 포기한 다른 무언가가 실은 더 좋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고, 만약 그렇다면 내내 과거를 후회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잘못된 선택 자체가 나 스스로를 별로인 사람으로 낙인 찍을까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가능성의 세계에만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은 나를 제자리에 머물게 만들고, 무기력을 학습하게 만든다. 용기를 내 계속해서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여정은 어쩌면 자기 자신과의 신뢰를 쌓는 연습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최선을 다해 선택했다면 그 자체로 잘못된 선택이 아님을 믿어야 하고,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할 일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또 다음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는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 이후 조금씩 나이들며 점차 선택할 일이 줄어들게 되면, 지금까지의 내 선택들이 이어진 결과로서의 내 삶을 담담히 긍정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영화가 끝나면 사라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에 비추어 ‘그래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 오래 사랑받는 이야기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여름 이야기>를 ‘사랑’의 테마와 ‘선택’의 테마 두 가지 버전으로 해석해본 것처럼, 여러 각도에서 해석될 여지를 준다면 더욱 좋은 이야기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 조금 더 나이가 든 후에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또다른 이야기로 읽힐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스스로와 더 견고한 신뢰를 쌓은 사람이 되어있으면 좋겠다. 선택으로 인해 괴로웠던 한 시절이 마침내 지나갔음을 느끼며, 선택에 대한 결과로서의 새로운 인생의 시절을 기쁘게 맞이하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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