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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종달이 Apr 20. 2023

제 꿈은 세스코맨이에요.(2), 그 후 이야기들.

2022년, 아들이 나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1:1 PT를 받으면서 몸이 회복되었던 아들의 사춘기 취미는 마술, 기타 그리고 운동이었다.


"엄마, 나 운동 선수 될 거예요. 종합 격투기 선수요."


운동선수라는 단어도 왜 달갑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뒤에 따라붙는 '종합격투기선수'는 왜 더 맘에

들지 않았을까?


"제 한국형 롤 모델은 정찬성.. 아무래도 정찬성 선수가 하는 운동 클럽에 들어가야...... 삐................"


아들이 뭐라 하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갖 물음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왜? 많고 많은 운동 중에서 ? 왜 하필??"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다.

누군가를 치고받고 , 피 터지는 장면에 환호하고 응원하면서 사람들이 똘똘 뭉치는 것.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킥복싱과 주짓수에 중학교 2학년을 홀랑 갖다 바친 아들은 '운동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거의 이 수준이었다.

'저러다 말겠지.' 아니었다.

운동을 시작한 지 4개월이 되자, 킥복싱 대회가 열렸다.

절대 나갈 실력이 안 되는데, 관장님께 조르고 졸라 아들은 출전 허락을 받아냈다.


'세상이 만만해 보이지? 가서 얻어 맞아봐야지 정신이 들지. 그래, 차라리 잘 됐어.'




주최 측의 실수로 70kg 출전이었던 아들이, 75kg 출전이 되었다는 소식을 대회 하루 전 날 알게 되었다.

막무가내였다. 기권하지 않고 나간다는 아들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녀 출전, 목표 체중보다도 높은 체급, 더구나 상대는 '무하마드 알리'를 연상시키는 외국 선수(아마추어 선수 데뷔전) 이었다.

아들은 킥복싱 4개월, 상대편 외국 선수는 킥복싱 1년 6개월 차.


참. 어이없었다. 아들도 상대편 선수의 등치와 기세에 눌려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어머님, 절대 안 다치도록, 부상당할 것 같으면
흰색 수건을 제가 던질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관장님의 말을 믿었다. 관장님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응원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흰색 수건을 들고서!!



경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들은 1라운드에서 미친 듯이 싸웠다. 외국 선수를 피해 가면서 잘 싸웠다.

 아니 잘 때리고 있었다.

차마, 가까이에서 사진 한 장 건네지 못한 채, 손을 벌벌 떤 채로 있는 나는 사람들이 아들을 응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지, 더 쳐. 더 가까이. 치라고!"


일면식도 없는 고등학생 남자아이가 '한 덩치' 하는 외국인 선수와 싸우는 장면에 사람들은 모두 흥분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1라운드는 아들의 승리였다. 2라운드-이번에는 아들도 쳐 맞았다.

막상 폰을 들고 동영상을 찍으려고 하니, 아들이 맞았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쉬는 시간에 아들 코에서 빨간색의 액체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들이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관장님이 하얀색 수건을 던져줄 거란 내 예상과는

 다르게 또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들이 '턱'을 맞았다. 휘청 거렸다. 갑자기 둘이서 '킥복싱'이 아닌, '개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한 대 치고, 한 대 맞고, 킥 날리고, 킥 맞고..

3라운드는 두 녀석 다, 헉헉 대면서 몸을 끌어안고,

치고 맞고 치고 맞고...

2:1 판정으로 아들이 졌다.

그런데 너무 잘 싸운 것이다. 코피가 줄줄 흐르고 두 눈이

퉁퉁 부은 아들은 신이 난 어린아이 같았다.




킥복싱을 매일 하면서, 누가 뭐라 하든 '킥복싱 선수'가 꿈이라고 말하는 아들은 매일 부상을 달고 다녔다. 부러지고,  금 가고, 수술하고 , 또 다시 부러지고.

제대로 재활 없이 운동을 하겠다는 고집 때문에 회복은 더디고 몸은 더 망가졌다.


하지만 아들의 꿈은 더 커져갔다. 실컷 먹고 토를 한 날에도 ,

몸무게 때문에 스스로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면서 괴로워했던 날에도. 아들은 매일 체육관을 가서 운동을 하고 있다.


아들의 꿈은 아직 ing이다.


"저, 서울에 방 좀 얻어 주세요. 아무래도 학교를 그만두고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라는 소리도 주기적으로 한다.


매일 쉐도우 복싱을 하고, 외국 선수들 영상을 보고 분석을 한다. 공부 하라는 공책에는 '킥복싱 자세'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정찬성 유튜브를 정구독, 관장님과 스파링, 형들과 스파링, 깨지고 부서지고 병원 가고 약 먹고.... 일상이다.



토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것처럼,

아들이 운동을 하고 마치 '예비 운동선수 엄마'인 것처럼

덤덤하게 코피 나도 , 부상당해도 '그러려니' 하는 것도

나의 일상이 되었다.



거식증, 그리고 폭식증 그 3년 속에서 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터널 속에 있다.

빛이 보이지 않았던 깜깜함 속에서 빛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저 멀리서 '빛'이 보여서 달려갔더니 이내 사라졌다.

다시 어둠 속에 갇혀서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나와 아들은...

우리는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그 끔찍했던 3년을 지나오면서 느꼈던 것은

나는 결코 좋은 엄마도,

괜찮은 엄마도 아니었다는 것.

최악의 엄마, 나쁜 엄마,

부모 꼰대의 대표자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라는 이름 하에

쉽게 '나쁜 버릇' 하나 못 고치는 50을 바라보는 중년일 뿐.


그렇게 엄마가 되어 가나 보다.

그렇게 세상을 이제야 배워 가나 보다.



어쩜, 열일곱의 아들이 나보다 더 성숙했을 수도 있다.

저 아이는 벌써 세상 속에서 살아 보려고 나름 '생존전략'을 찾고 있는 거니까.



너무 힘든 시간이었기에, 아직도 진행 중이라서

웃었던 날보다는 울었던 날이 더 많았다.

아들을 사랑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내 정신력이 무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들이 죽는다고 할 때,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하고 도망치고 싶었던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나도 그렇게 나이 들어 가나 보다.

나도 그렇게 사람다와 지나 보다.


나도 그렇게 철이 들어가나 보다.


'너'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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