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소설이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올해 가기 전, 등록해 보세요. 꼭이요."
낯익은 전화번호다. 1년 동안 내 전화에 종종 떴던 결혼 정보 회사 번호.
몇 번은 일부러 받지 않은 적도 있었고, 몇 번은 받고 지금 당장은 누굴 만날 생각이 없다는 말로 끊었던 전화가 하필 이때 오다니 아마도 드디어 때가 온 듯싶다. 얼마 전, 애들 아빠는 또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고 나에게 말을 했다. 항상 타이밍은 절묘했다. 인생 타이밍은 내게 있어서 늘 그랬다.
"네.. 안녕하세요?"
"교수님, 지금 나이가 얼마나 좋아요? 이제 누구 만나셔야죠. 언제까지 혼자 계실 거예요?"
"네... 뭐, 그렇죠.... 참, 저 학교 그만뒀어요."
전화기 속에서 교수님, 교수님 하는 말이 영 거슬려서 나는 묻지도 않은 말을 먼저 했다. 내가 지금 학교를 나와서 내 사업을 시작했다고. 결혼 정보회사 담당자는 다소 놀란 듯했지만, '어머, 넘 잘 됐어요. 이제부터 더 잘 되시려고 하나 봐요.'라는 말을 하면서 바로 다음 대화로 넘어갔다.
내 나이 47세, 뭐가 꽃다운 나이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결혼 정보 회사 이사라는 직책의 매니저 말에 의하면 나는 정말 꽃다운 나이란다. 30대는 너무 젊고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없고, 40대 초반반 해도 애들 키우느라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는데, 40대 중반이 넘어가면 애들도 어느 정도 손을 덜 타고, 슬슬 여유도 생겨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50이 안 넘었다는 것이 '돌싱 세상, 재혼 시장'에선 매력적인 나이란다. 하긴, 생각해 보면 어리면 어리다고 좋다고 할 거고, 나이가 있고 돈이 있음 그것도 좋다고 할 것이 매니저들의 일 아닐까 순간 생각했다.
"네, 안 그래도 저도 요새 맘에 변화가 생겨서요.. 연락 한 번 드리려 했어요"
"어멋, 그러셨어요? 잘 됐다. 그렇죠? 이제부터라도 누구 만나야 해요. 너무 아깝잖아요."
"네.... 맞아요, 아까워요. 억울하고요. 나만 이러기는 너무 억울한 것 같아요."
그랬다. 정말 억울했다.
갑자기 나는,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결혼 정보회사 직원에게 하소연을 해 버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녔는데, 나는 나 혼자 전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기다릴수록 가망이 생기다가도, 가로막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얼마 전, 생각지도 않던 전 시누이 전화까지 받고 새벽까지 욕을 한가득 먹은 상황에서 이제 더 기다리고 할 것도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두고 장난을 친듯한 전 남편의 행동이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남자를 만나고 싶다기보다는 '나도 네가 아녀도 된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행동이라도 해야 속이 편할 것 같았다.
"네, 저 이사님 뵈러 갈게요. 저도 이제 남자 만나야겠어요. 좋은 사람 있겠죠."
내 말이 끝나자마자, 매니저 그녀는 온갖 애교 섞인 목소리로 너무 잘했다고 나를 치켜세워주었다.
"네.... 뭐.. 그렇죠. 그런 것 때문에 결국 싸움이 된 것이고 이혼이 된 것이니..."
결혼 정보 회사 매니저와 차를 마시면서 상담을 나누다가 신청서 내용을 보니 괜히 왔다 싶은 후회가 들었다.
학력, 종교, 직업 등등.. 나쁘지 않았다. 열심히 잘 살았으니까.
다만.. 이제부터는 진짜 현실이다.
부모 직업, 재산
현 재산,
자가, 전세, 월세,
주택 형태,
차량
.......
나는 그 순간, 내 앞에 놓인 신청서를 북북 찢고 상담실을 뛰쳐나오고 싶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면서 '교수님'이라고 온갖 아양을 떨면서 호객 행위에 집중했던 매니저 얼굴의 변화도 순간 눈치챘다.
그 매니저도 내 기록 사항을 보고 후회했을 것이다.
'아, 이런 알그지를 굳이....'
그랬다. 나는 알그지 돌싱, 나만 알그지뿐만이 아니라 부모까지 쫄딱 망한 집안의 장녀, 돈으로 엮어서 이혼까지 했던 빈 털털이에 이혼녀였다.
"그런데, 정말... 남편한테 위자료 안 받았어요?"
"네.. 정말 안 받았어요. 왜냐면, 우리 집이 잘못한 거고, 나는...... 그때... 이혼을 해야만 했고... 무조건 애들만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정말? 너무 순진하다. 세상 물정을 이렇게 모르실까?"
내 손으로 이혼을 요구했고, 가짜 이혼 운운하던 남편에게 강력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나는 위자료 따윈 필요 없으니, 애들만 키우게 해 달라는 말로 아주 호기롭게 이혼을 했다. 6년 전, 나는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른 미친년처럼 세상 앞에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세상아 와 봐라. 나 할 수 있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어찌 보면 나는 현실 속과는 거리가 먼 듯한 생각을 가진 사람일 수 있음을.
현실 감각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고, 좋은 말로 하면 좀 순진하다....
나이가 들수록 '순진하다'는 말보다는 세상은 '야무지고 똑똑함'을 더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 결심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왜 다들 돈, 돈 하는지도.
결국 나는 '재산 없음, 월세, 부모 재산 없음' 모두 없음에 선택을 하고 350만 원이란 돈을 내고 등록을 하였다.
영업 행위인 줄 아는데, 이사는 내 학력이나 외모가 평균 이상은 된다면서 나를 Vip 등급으로 상향해 준다고 했다. 소위 말하는 전문직종과 재산이 있는 Vip 등급.
Vip 등급으로 억지 상향 조정이 되어서 결혼 정보 회사 등록을 하고 온 날, 내일 당장 멋진 최고의 남자가 나를 기다려 줄 것 같은 예감에 콧노래를 불렀다.
'젠장, 회원비는 회원비고.. 뭐, 어찌 됐든 검증된 사람들이라고 하니, 믿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