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서 나와 다시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로 향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고요한 아침의 모습은 봤지만, 건물이 아닌 캠퍼스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고 싶었다. 아침만 먹고 다시 온 것인데도 캠퍼스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칼리지 정문에 이르자 시끌벅적하게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러 나라의 말들 속에 파묻힌 상태로 나도 그 사람들과 함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내부로 들어갔다.
감격스러웠다. 말로만 듣던 옥스퍼드 대학이라니, 중세 시대부터 천년 가까이 이 공간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영혼이 느껴졌다. 고결한 이상을 품고 자신의 젊음을 불태우던 이들의 흔적이 건물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들과 같은 장소에서 식사를 하고,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이 공간을 거쳐간 이들의 얘기를 나누며 자신들이 얘기하던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방 밖으로 나오려다 관광객들이 보이자 다시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학생을 보며, 내가 관광객들 중 한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슬퍼졌다. 최대한 이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위인들의 초상화로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다이닝 홀에서 학생들의 점심 식사를 위해 식탁에 놓인 그릇과 포크, 나이프를 살펴보는 것 정도였다. 아쉬웠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이게 바로 조금 있으면 그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갈 것들이구나 생각하며 허락된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돌아다녔다.
다이닝 홀도 살펴보고, 칼리지 안의 성당도 꼼꼼히 살펴보고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를 나오니 어느덧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있었다. 근처를 돌아다니다 레드클리프 키메라 도서관 근처에서 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밖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는데, 시끌벅적하게 식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활기가 느껴졌다. 나이대를 보아하니 학부생은 없어 보였다. 옷차림이 관광객의 모습인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대학원 석박사 과정이나 교수님들 아니면 교직원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식당 앞 레드클리프 키메라 도서관은 대학 도서관이라고 하기에 너무 작았지만, 아름다운 원형 건축물이었고 그 안에서 책을 읽으면 뭔가 엄청난 영감이 떠오를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한 번 들어가 보려고 알아봤었지만 외부인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 앞을 지나다니는 학생들 중 방금 시험이라도 마쳤는지 환하게 웃으며 돌아다니는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보기 좋았다. 그 아름다운 시절에 나는 뭐가 그리 심각했었는지 모르겠다. 많이 웃고 많이 누릴 수도 있었는데, 뭐가 그리 무겁고 뭐가 그리 아팠던 건지 모르겠다. 계란을 살짝 입혀 구워낸 바게트 빵과 신선한 샐러드는 훌륭했다. 다이닝 홀에서 못 먹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이렇게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다른 몇몇 칼리지와 도서관들을 더 방문했지만, 학생들 생활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개방돼 있다 보니 외부 방문객이 볼 수 있는 것들은 어느 칼리지나 비슷했다. 계속 돌아다니다 보니 출출해져서 C. S. 루이스와 J. R. R. 톨킨이 즐겨 찾았다는 펍을 찾아갔다.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와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때문에 두 작가에 대해 조금씩은 알고 있었다. 이 위대한 작가들이 즐겨 찾았던 공간에서 그 사람들도 한 번쯤은 먹어봤을 피시 앤 칩스를 주문했다. 술은 안 마시지만, 이곳 학생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펍에서 느끼는 기분을 즐기기 위해 무알콜 맥주도 하나 추가했다. 무알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후에 생선 튀김을 잘라 입에 넣었는데, 위대한 작가들이 찾아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음식이 맛있었다. 늦은 밤 학구열로 불태우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고, 이른 아침 고요한 캠퍼스의 모습도 봤다. 중세시대부터 전해져 온 이 도시의 유산들과 현시대에 이 캠퍼스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위대한 작가들과 함께 그들이 즐기던 음식도 먹었으니 옥스퍼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경험한 셈이었다. 이제 런던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펍을 나와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