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에서 출발한 열차의 최종 목적지는 런던 패딩턴 역이었다. 패딩턴 역에서 세인트 판크라스 역 근처의 숙소까지 걸어가려면 런던 중심부를 가로질러 4 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걸어야 했다. 처음 런던을 방문했던 날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거리의 모습을 보고자 그 정도 거리도 기꺼이 걸었을 테지만, 이 날은 어떻게든 숙소에 빨리 가서 짐을 풀고 싶었다. 패딩턴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숙소 근처까지 간 후에 거기서부터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외국 지하철은 처음이었다. 가급적 땅 위 거리의 모습을 보며 이동하려다 보니 지하철을 타기보다 주로 걸었고, 걷는 게 힘든 상황이면 버스나 택시를 이용했었다. 지하철 표를 어디서 사야 하는지 두리번거리다 겨우 티켓 판매기를 발견하고 그 앞에서 사용법을 연구할 때였다. 모자를 쓰고 턱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남자의 옷은 허름했지만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는 나에게 지하철 티켓 하나를 보여주며 티켓을 자기한테 사라고 했다. 밑을 내려다보며 풀 죽은 목소리로 횟수 제한 없이 마음껏 쓸 수 있는 티켓이라고 얘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남자에게 돈을 주고 티켓을 샀다.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하철 역에서 알지도 못하는 아시아 여행자에게 티켓을 속여 팔려고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은 결코 그가 원했던 게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 깨끗한 것을 보면 남자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온 일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자기의 본성마저 부숴버릴 정도라면 그 마음의 두려움과 막막함이 얼마나 컸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내가 지불한 '프리 패스'의 금액이 그 사람의 행운의 시발점이 되길 기도하며 개표구를 통과하려는데, 티켓을 어디에 넣어야 하는 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티켓을 넣는 곳을 찾지 못해 쩔쩔매고 있자, 내가 개표구를 통과하는 걸 지켜보던 남자가 나섰다. 자기가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겠다며 내 표를 넣어 개표구를 통과하게 해 주더니, 아예 내가 가는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따라나섰다. 그럴 필요 없다며 극구 말리는데도 자기 표를 개표구에 집어넣고 따라오는 남자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런던 지하철 노선도 잘 모르는데 남자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어느 역까지 가는지 말해주자 남자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남자를 따라 도착한 플랫폼에서 잠시 기다리자 지하철이 도착했는데, 이제 작별 인사를 하고 남자를 보내려는 순간 남자가 먼저 지하철에 올라탔다.
함께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을 가는 동안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고, 나도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아 잠자코 서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남자가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같이 개표구를 통과하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 이르자 남자가 그만 가보겠다고 얘기를 꺼냈다.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하고 싶었지만 말하진 않았다. 대신 가이드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설령 남자가 준 티켓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남자는 그 돈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남자와 헤어져 숙소로 걸어가며 그래도 티켓이 제대로 쓸 수 있는 건지는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시내 중심부로 걸어가며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하철 역에 들러 개표구에 티켓을 넣어봤는데,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자꾸 티켓이 튀어나와 다시 걸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