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tared

by 히다이드

영국에서의 마지막 숙소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옆 방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모여 시끄럽게 수다를 떨고 있었지만 나는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하고 자유롭게 얘기할 정도로 영어가 익숙한 것도 아니었고 나이도 그 사람들보다 많았다. 누군가 나에게 너는 뭘 하고 있냐고 물어보면 딱히 할 얘기도 없었다. 내 방에서 짐이나 싸고 있었는데, 같은 방 침대에 누워있던 금발의 20 대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첫날 숙소에 도착해 방에 들어섰을 때,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머리를 내저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던 남자였다. 마치 내가 자기에게 말을 못 걸어 안달을 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숙소에서 이틀을 보내며 인사 한 마디 없이 아예 무시하고 있었는데, 먼저 말을 걸어오니 그래도 반가웠다.


프랑스에서 왔다는 남자는 금발의 곱슬머리에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마음을 훈훈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짧게 대화를 해보니 좋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영어를 잘 못해도 말하는 태도나 뉘앙스를 보면 상대방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알 수 있는 것 같다. 이 금발 남자는 내가 다음날 파리에 갈 거라고 하자 약간 놀라더니 이내 차분해져서 어디에 갈 거냐고 물어봤다. 남자와 함께 파리에 관해 짧게 얘기를 주고받은 후에 다시 각자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남자와 작별 인사를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서려는데,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무리와 눈이 마주치게 됐다. 가장 앞서 들어오던 금발의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쳤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도저히 다른 곳을 볼 수가 없었다. 멍하니 그 눈만 바라보고 있는데 뒤따라 들어오던 남자들 중 한 명이 "stared"라고 말하며 킥킥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여자는 약간 당황한 듯하면서도 부끄러운지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영어로 'stare'의 의미가 '응시하다'라고 알고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이성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쳐다보는 것을 'stare'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는 건지는 몰랐었다. 맞다. 그녀는 참 아름다웠다. 이렇게 스쳐 지나가야 하는 운명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way'의 영국식 발음을 배우면서 시작했던 나의 영국 여행은 'stare'의 용법을 배우는 것으로 끝나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영어공부로 시작해 영어공부로 끝나는 셈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숙소를 나와 세인트 판크라스 역으로 걷기 시작했다. 특별한 게 없는 평범한 거리였지만 그래도 하나라도 더 담으려고 천천히 걸었다. 몇십 분 정도를 걷고 나자 세인트 판크라스 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킹스크로스 역과 마주 보고 있어 전날에도 지나쳤었지만 영국을 떠나는 기차를 타려고 온 날이라 그런지 하루 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3주 전 처음 영국에 도착하고 눈앞에 펼쳐졌던 모습들을 짧게 감상한 후에 역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따라 걷다 잠깐 뒤를 돌아봤는데, 출입구 밖에서 비춰오는 빛 속에서 내가 떠나는 영국의 모습이 살짝 보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그 문으로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꼭 다시 오겠다는 마음의 다짐과 함께 유로스타 승강장을 향해 돌아섰다.


승강장 앞에 있던 피아노는 그대로였다. 영국에 도착한 첫날 한 연주자가 멋진 연주를 들려줬던 피아노였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연주자가 없었다. 피아노 앞에 다가가 주머니에 있던 영국 동전들을 전부 끄집어낸 후에 가지런히 모아서 피아노 위에 올려놨다. 멋진 연주를 해줬던 것에 대해 작은 답례를 하고 싶었다. 아주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정말로 고마워했었다는 게 전달되길 바라며 파리행 유로스타의 플랫폼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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