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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May 06. 2024

일터의 철학자가 되자.

몇 달 전 발령을 통해 자리를 이동하면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게 메일을 남겼다. 메일 내용은 함께 해줘서 고마웠다는 상투적인 인사말과 함께, 개인과 조직의 성과라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보자는 제안이었다(구글 UX 디자이너인 김은주 님의 글이 도움 되었다). 그리고 작은 조직의 리더로 함께 일하면서 평소 가졌던 생각을 몇 개의 파일로 정리해서 공유도 했다.


후배가 답장을 해 주었다. 지난 3년 간 함께 일하면서 예전과 또 다르게 성장하고 달라진 나를 보았다며, 보고 배운다는 고마운 내용이었다. 내가 해외 근무 하기 전에 4년 정도 같은 조직에서 있었던 경험이 있기에, 어쩌면 나라는 사람을 오랜 시간 관찰하고 좀 더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수 있는 친구라서 나를 향한 칭찬의 메일에 기분이 꽤 좋았다. 윗사람에게 인정받는 기쁨과 달리, 후배나 동료의 기대와 칭찬은 남다르게 느껴진다. 상사의 쓸모라는 측면에서 나의 존재 가치 보다 옆자리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이유에는 더 강력한 힘이 있다.


무엇이 나를 변하게 했을까.


흔히 스킬 셋이라고 부르는, 업무의 기술적인 것을 배우고 익히고 행하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이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였다. 생각이 조금 부족할 순 있으나 기계적으로 사람은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얼추 전문가라는 칭호에 가까워진다. 일이 주어지면 '정해진 프로세스나 프로토콜에 맞춰 처리한다', 그게 회사 일의 극단적인 단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유연한 사고와 자신의 생각이 탑재되면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졌으면서도, 남들과 다르게 일을 처리하는 어나더 레벨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동료를 바라보고 함께 일하는 태도를 갖는 것은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하고자 하는 대로 무엇이든 술술 잘 풀렸다면 나도 동료와 후배의 기술을 빼먹기만 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나 잘난 맛에 길들여져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싫은 건 남에게 떠밀었을 수 있다. 예전의 나를 떠올려 보면 자신의 영달을 위해 더 많은 수고를 들였다. 논문을 쓰는 것도 나의 기쁨이었고, 어떤 자리에서 발표를 하는 이유도 나를 돋보이게 하는 기회로서 그 가치를 찾았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아요’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 데는 적당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안되고 좌절하면서 자꾸 다르게 해 보려고 고민하고 시도한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많은 일들이 혼자 잘나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요, 나를 위해서 세상이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 느지막히라도 알게 되었다. 나이와 경력, 그리고 실패와 좌절이 가져다 주는 효능이다. 나의 존재는 실은 동료를 위해 있다. 그걸 알아채면 언제든 조직에서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또한 다른 일을 해 볼 다른 방식의 용기도 갖게 된다. 


물론 누구에게나 아무 때나 들어 맞는 얘기는 아니리라. 적당한 때가 있다. 연차가 쌓일 때까지는 기술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갖추는 시기이다. 주어진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해결하고, 새로운 것을 제시하고, 또 자기 가치와 브랜드를 공고히 다져야 한다. 욕심은 당연히 가져야 하고 성과를 위해 몰입하는 시기도 필요하다. 작은 조직이나 과제를 리드해 가면서 경험을 쌓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동료와 함께 하는 것의 즐거움도 배우지만 동료와 함께 하기에 힘든 것, 때론 좌절도 해보고 화나는 상황도 맞이해 봐야 한다. 그게 모여서 속된 말로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내가 경험한 수많은 리더들에게 가장 안타까운 점은 후배 사원들과 과제의 성과를 위한 논의는 끝없이 하면서도, 리더로서 조직 운영이나 사람에 대한 경영 철학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해는 된다. 리더의 자리가 되면 성과의 압박이 상당하기에, '일하는 자로서 철학' 운운하는 것이 사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리더가 된다는 건, 다른 누군가의 직업적 삶에 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리인만큼 스킬 셋 이상의 정신적인 무엇이 요구된다. 


만약 기술의 전문성을 통해 성과를 이루고 리더의 자리에 올랐다면, 그 다음 단계로 거듭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 헤매도록 하자. 어떤 사람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를 통해서 성장한다. 누군가는 책에서 길을 찾을 것이다. 내게 있어 그 방법을 찾는 과정은 독서와 사고(글쓰기), 시도, (동료의) 피드백, 그리고 게이름이었다. 다른 말들은 대부분 이해가 될 것 같은데 게으름이란 단어가 자못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글쎄, 이게 핑계라고 보일 수 있지만 바쁠수록 게으름 피울 기회(시간이든 공간이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일 자체의 바쁨에 치여 지내면 생각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생각을 통해 상황을 객관화 하지 못해 매몰되기 쉽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여유가 없어진다. 몰입하는 것만큼 잡념을 가질 기회를 만들 때, 바쁨의 틈바구니에서 방향을 잃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자기반성과 회고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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