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가 역대 최장 기간을 매일 경신하고, 에어컨 없는 집안은 상상할 수 없고, 무더위라는 단어가 여름의 일상 용어인가 보다 싶을 즈음 어느 날이었다. 퇴근 후에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려니 이미 출입구를 기준으로 안쪽 두 귀퉁이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비어 있는 앞자리에 서서 30층을 눌렀다.
몇 개층을 올라가 내 오른편 구석에 있던 사람이 먼저 내렸다. 그러자 대뜸 반대편 구석의 남자가 말을 건넸다.
‘저리 안 가세요? 저기가 상석인데 허허’
그도 그럴 것이, 여름이면 이 작은 사각형의 공간이 하도 더워서인지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중이었다. 시원한 바람은 딱 두 군데를 중심으로 나오는데 그게 바로 두 사람이 선점하여 있던 안쪽의 두 귀퉁이 머리 위쪽이다. 그러니 그가 말한 ‘상석’이란, 직방으로 찬 바람을 맞으며 단지 몇 초라도 누구보다 시원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자리를 뜻하는 바였다. 자동차를 탈 때나 식사 자리에서 상석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엘리베이터에도 상석이 있다는 표현은 처음 들었다. 재미난 분이네.
그 몇 초의 차이를 위해 자리를 옮기기는 귀찮기도 하고 말 듣고 쪼르르 옮기는 게 가벼워 보여, ‘하하, 아니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더랬다. 그런데 그 이후 매번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면 나도 모르게 예의 그 상석을 찾아 자연스레 발을 옮기게 되었다. 애초에 구석자리가 시원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나 한 번 말을 듣고 나니 어쩐지 챙겨 먹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름을 부르기 전엔 아무것도 아니었다‘가 이름을 부른 순간 꽃이 된다는 시구처럼, 상석은 내게 그런 존재가 되었다. 매번 귀퉁이자리에 설 때마다, ‘하, 상석이라‘ 하며 낯선 이의 재치 있는 표현을 떠올린 건 어쩔 수 없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날씨가 선선해지는 요즘이다. 출근길에 회사 정문을 통과해 언덕을 오르는데,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눈에 들었다. 태풍이 불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끄덕 없이 붙어 있던 그들이 한낯 미풍을 타고 사뿐히 나부낄 수 있다는 건 가을이라는 계절로 넘어간다는 소식이다. 비로소 정신을 차려 주변을 살펴보니 바닥에 뒹구는 낙엽들이 제법 보였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열대야의 고통도, 덕분에 며칠간 누렸던 엘리베이터 상석의 기회도 시나브로 마감되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