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락카페 스페이스의 수질 관리 비법
남자중학교와 남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대학에 들어가면 예쁜 여학생들과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농담하며 깔깔대고 장난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 그런 게 캠퍼스의 낭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입학한 대학교는 원래도 여학생 비율이 적었는데, 내가 입학한 해에는 전체 신입생 중 여학생 비율이 10%가 채 안되었고, 그중에서도 경영대는 신입생 400명 중에 여학생이 1%도 안 되는 거의 남자대학교였다.
이성 친구를 만나기 위해 미팅을 다녀봐도 마음에 드는 짝을 찾을 수 없어 공허함만 커질 무렵,
예쁜 여자들은 다 나이트클럽에 있다
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90년대 초 강남에서 물 좋기로 소문난 나이트클럽은 강남역 6번 출구 뉴욕제과 뒷골목에 있던 시에스타, 그 건너편의 오디세이, 그리고 지금의 교보문고 사거리 뒷골목에 있던 헌터스 등이었다.
물론 힐탑호텔 사가 등 호텔나이트가 훨씬 고급스럽기는 했지만, 호텔나이트는 그들만의 리그라 생각했기에 우리에게는 강남역 나이트클럽으로도 충분했다.
나이트클럽이 스릴 있었던 이유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외모나 복장이 촌스러우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거구의 기도 형님들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곳에 갈 때면 항상 긴장을 하게 됐고, 무사히 통과했을 때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나이트 안은 그야말로 선남선녀들이 가득 찬 공간이었고, 학교에서 시커먼 남자들만 봐온 우리에게 그곳은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80년대 중반 이후로 나이트클럽이 성행했던 이유는,
80년에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오일쇼크로 침체된 경제도 살리고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대중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기 때문이었다.
심야영업이 허용되면서 호황을 맞게 된 곳이 나이트클럽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아딧 군인 출신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절이었다. 너무 고삐를 풀어놨다고 생각했는지 90년 1월부터 모든 업소의 야간영업(밤 12시~새벽 5시)을 금지했다. 그래서 90년에 처음 나이트클럽에 간 우리는 비싼 돈 주고 들어간 만큼 오래 놀기 위해서 해가 아직 중천에 떠있을 때 맨 정신으로 입장을 했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밤늦게까지 놀고 싶었고, 업소의 주인들도 밤에 집으로 돌아가는 젊은이들을 보며 본전 생각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유흥업소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더 죄기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했고, 호텔 나이트클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나이트클럽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편법으로 등장한 것이 락카페였다.
락카페는 높은 세율을 피하기 위해 유흥업소가 아닌 일반음식점으로 등록을 했고, 그래서 나이트클럽의 상징인 댄스플로어가 없었다.
하지만, 스테이지가 없어도 신나는 음악과 화려한 조명 그리고 술과 분위기만 맞으면 젊은 영혼들은 식탁 옆 좁은 통로에서도 신나게 춤을 출 수 있었다.
그러다가 경찰 단속이 뜨면 조명은 은은한 실내등으로 바뀌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며 손님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착석하여 담소를 나누는 일사불란하고 아름다운 기적이 펼쳐졌다.
락카페가 인기를 끈 이유는 일반 술집에서처럼 술과 안주 값만 있으면 됐고, 나이트처럼 과도하게 부킹을 부추기지 않아도 알아서 놀고 알아서 부킹하며 어울리는 서구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악도 나이트클럽처럼 귀청 떨어지게 시끄럽지 않고 식탁 옆에서 가볍게 몸을 흔들만한 트렌디한 노래들이 흘러나왔는데, 그때 락카페에서 가장 많이 들렸던 노래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였다고 한다.
당시 이태원, 홍대 앞, 신촌, 강남 등에 유명한 락카페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신촌에 있던 스페이스가 인상적이었다.
원래 그 자리는 '장미여관'이라는 오래된 여관이 있었는데, 나도 신촌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야간영업 금지로 갈 곳이 없어지면 장미여관에서 밤새 몸을 녹이며 술을 마시다가 첫차를 타고 귀가하던 기억이 있던 곳이다.
특히, 현직 교수로 재직 중에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목의 에세이로 주목을 받은 연세대 국어국문과 마광수 교수가 그의 소설 "즐거운 사라"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구속되면서, 사회적으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거워졌고, 그 와중에 그가 썼던 "가자, 장미여관으로"라는 시가 알려지며 뜬금없이 유명세를 치른 곳이었다.
그렇게 사연 많고 유명했던 낡은 여관을 허물고 화려한 4층 건물이 들어섰는데, 전층을 통으로 락카페로 문을 연 곳이 '스페이스'였다.
"응답하라 1994"에서도 에피소드로 다뤄진 적이 있는데, 이곳은 층별로 물관리를 하는 것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물이 좋고 지하가 제일 열악했는데, 그 차이가 천당과 지옥 같다고들 했다.
하지만, 락카페의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6년 9월에 신촌의 락카페 롤링스톤즈에서 화재가 나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식탁과 식탁 사이 좁은 통로에서 춤을 추는 구조라서 대피가 쉽지 않았고, 유흥업소와 달리 소방안전 단속의 사각지대였다. 이 사고를 계기로 락카페는 위험시설로 낙인찍혔다. 그 이후로 락카페는 자취를 감추고, 요즘 젊은이들이 잘 가는 '클럽'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얼마 전, 젊은 MZ세대 직원들과의 술자리에서 내가 젊었을 때 락카페라는 곳이 유행했었다고 했더니, 30대 중반의 한 직원이 자기도 락카페를 자주 갔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그 친구가 말한 곳은 Rock Band Club이었다.
겨우 단어 하나 차이 같지만, 그곳엔 Rock이 있지만 락카페에는 Rock이 없었다.
PS) ‘락카페’라는 이름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당시 친구들과 내렸던 우리의 결론은..
춤추며 놀 수 있는 즐거운 카페, 즉 ‘樂Cafe’ 였다.
<환상 속의 그대 - 서태지와 아이들,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