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열정, 끝내지 못한 사랑의 노래
1985년 7월 13일,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기근과 내전으로 고통받던 아프리카를 돕기 위해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모인 초대형 자선 공연 Live Aid가 열렸다. 전 세계 15억 명이 위성으로 지켜보던 무대에 수많은 슈퍼스타가 올랐지만, 그날의 주인공은 단연 퀸이었다.
프레디가 피아노 앞에 앉자 경기장은 숨을 죽였다. 첫 건반이 울리며 〈Bohemian Rhapsody〉가 시작되자, 고요는 곧 거대한 환호로 바뀌었다. 〈Radio Ga Ga〉에선 수만 명이 손뼉을 치며 떼창으로 화답했고, 〈We Will Rock You〉에서는 프레디의 리드에 맞춰 발을 구르며 하나의 리듬을 만들었다. 마지막 〈We Are the Champions〉가 울려 퍼질 때, 웸블리 전체는 거대한 합창단이 되어 서로의 목소리를 겹쳐 불렀다.
나는 지금도 이 영상을 볼 때마다 전율과 동시에,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그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팬들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한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경외심을 느낀다.
프레디 머큐리, 본명 파록 불사라(Farrokh Bulsara).
그는 1946년 동아프리카의 잔지바르에서 파르시계 인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인도의 기숙학교로 유학을 가 피아노를 배우고 밴드를 조직하며 음악의 씨앗을 틔웠다.
십 대 후반 영국으로 이주했지만, 낯선 땅과 다른 외모, 이민자라는 배경은 그를 늘 주변부에 세웠다. 게다가 돌출된 치아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다른 존재’로 취급받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 경험들이 오히려 그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음악은 그가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되었다.
성장하면서 그는 자신이 동성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그것을 드러내기는 불가능했다. 그는 억눌린 자아를 무대 위에서 폭발시켰다. 화려한 의상, 과장된 제스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카리스마. 그것은 단순한 쇼맨십이 아니라, 존재를 입증하려는 절규였다.
1970년, 프레디 머큐리는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와 함께 밴드 퀸을 결성했다. 이듬해 존 디콘이 합류하면서 비로소 퀸의 완벽한 라인업이 갖추어졌다. 초기에는 대학가와 작은 클럽에서 공연했지만, 프레디의 화려한 무대 매너와 독창적인 보컬은 곧 주목을 받았다.
데뷔 앨범 Queen은 큰 상업적 성과는 없었지만, 프레디의 폭발적인 보컬과 밴드의 실험적 사운드는 “새로운 밴드가 나타났다”는 강렬한 신호를 남겼다. 이어 1974년 발표한 Sheer Heart Attack은 퀸의 색깔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하드록과 팝, 글램록을 넘나드는 사운드 속에서 〈Killer Queen〉은 영국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밴드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이 곡은 단순한 히트곡이 아니라, 퀸이 지닌 극적인 무대성과 연극적 감각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전환점이었다.
무대 위의 프레디는 이미 ‘극장형 가수’였다. 타이트한 의상과 과감한 제스처,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관객을 단숨에 압도했다. 작은 공연장도 그가 서는 순간 극장으로 변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는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캐릭터를 창조하고 이야기를 펼쳐내는 배우였다. 마이크 스탠드를 반만 들고 흔드는 독특한 퍼포먼스는 그만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그러나 화려한 외양 속에는 언제나 고독이 숨어 있었다. 이민자 출신, 다른 외모, 감춰진 성 정체성. 세상과 자신 사이의 간극은 커져만 갔고, 그 불안과 갈등은 음악 속에 은유적으로 새겨졌다. 아직 세상에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프레디의 노래와 무대는 이미 ‘틀을 벗어나려는 갈망’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1975년, 〈Bohemian Rhapsody〉가 세상에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의 모든 실험과 도전은 이 순간을 위한 예고편이었다.
1975년, 퀸은 이전에 없던 노래를 세상에 내놓았다.
록, 오페라, 발라드를 한 곡에 담은 〈Bohemian Rhapsody〉. 라디오 방송국들은 러닝타임이 “너무 길다”며 거절했지만, 프레디는 단 한 소절도 줄이지 않았다.
노래는 충격적인 고백으로 시작한다.
“Mama, just killed a man” (엄마, 방금 남성을 죽였어요)
이 살인의 고백은 실제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지배하던 남성성을 죽이고, 감춰온 진짜 나를 받아들이려는 자기 고백”으로 읽을 수 있다. 숨기고 억눌러야 했던 갈등과 두려움이 곡 전반을 지배한다.
그는 이렇게 토로한다.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고통, 세상과 부딪히며 겪어야 했던 외로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Nothing really matters to me / Any way the wind blows” (아무것도 내겐 중요하지 않아, 어떤 방향으로든 바람은 흘러가겠지.
이 구절은 단순한 허무가 아니다. 정체성에 대해 세상이 뭐라 하든, 소문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이제는 개의치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는 끝내 자신의 삶을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노래 속에 새겨두었다.
프레디의 삶에서 메리 오스틴은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다.
그는 메리를 “내 인생의 유일한 친구”라 불렀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곁에 두었다. 그러나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연인으로서 함께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가 떠나버릴까 두려웠다.
그 마음은 이 노래에 고스란히 담겼다.
“Love of my life, don’t leave me” (소중한 사랑이여, 날 떠나지 말아요)
〈Love of My Life〉는 단순한 러브송이 아니다.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언젠가 다가올 이별을 예감하는 두려움이 함께 묻어나는 절규였다. 프레디는 메리를 연인으로는 떠나보냈지만, 끝내 삶의 중심에서는 놓지 않았다.
현실에서 두 사람은 연인으로는 결별했지만, 가장 가까운 동반자로 남았다. 프레디가 세상을 떠날 때 가장 많은 유산을 메리에게 남긴 것도, 그녀가 그의 삶에서 마지막까지 특별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1980년대 후반, 프레디의 건강은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언론은 그의 외모 변화와 사생활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지만, 그는 공식적으로 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간에는 “프레디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돌았다. 1980년대는 동성애와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가장 강렬했던 시기였다. ‘게이의 병’이라는 낙인은 사람들을 고립시켰고, 프레디 역시 차가운 시선 속에서 침묵으로 버텨야 했다. 그는 무대와 스튜디오에서 음악으로만 답했다.
1990년대 초, 브라이언 메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이 곡을 부를 수 있겠어?”
프레디는 보드카를 한 모금 들이키고 미소 지었다.
“할 거야, darling.”
그렇게 완성된 곡이 1991년에 발표된〈The Show Must Go On〉이다.
"Inside my heart is breaking, my make-up may be flaking" (내 심장은 부서지고, 화장은 흩날리고 있지만)
"But my smile still stays on" (내 미소는 여전히 남아 있어)
"I’ll face it with a grin, I’m never giving in" (난 웃으며 맞설 거야, 절대 굴하지 않을 거야)
녹음 당시 그는 이미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러나 테이크가 시작되자 믿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보컬이 쏟아졌다. 남은 힘을 모아 던진, 마지막 의지의 목소리였다. 이 노래는 ‘무대 집착’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끝까지 예술가로 남으려는 결심이다. 무대 밖에서는 병마와 싸우던 몸이었지만, 무대 위의 그는 여전히 퀸의 리더이자 가장 빛나는 쇼맨이었다.
1991년 11월, 프레디 머큐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수많은 팬들이 거리에서 눈물을 흘렸고, 언론은 그의 마지막을 대서특필했다.
이듬해 1992년 4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에이즈 퇴치 자선 콘서트가 열렸다. 수많은 슈퍼스타들이 무대에 올라 퀸의 노래를 열창했고, 7만여 명의 관객이 함께했다. 특히 건즈 앤 로지스의 액슬 로즈와 엘튼 존이 〈Bohemian Rhapsody〉를 불렀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거대한 무대는 프레디의 부재가 얼마나 큰지를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시스트 존 디콘은 그 공연 이후 이렇게 말했다.
“프레디 없는 퀸은 더 이상 퀸이 아니다.”
이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가 무대를 이어갔지만, 그 말은 곧 진실이 되었다. 퀸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프레디라는 심장이 빠져나간 이후의 퀸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프레디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영화 'Bohemian Rhapsody'는 새로운 세대에게 그의 노래를 다시 알렸고, 전 세계 공연장에서는 여전히 〈We Are the Champions〉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지금도 우리 마음에 남아 있다.
“The show must go on” (쇼는 계속되어야 해)
그의 바람대로 쇼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도 여전히 계속된다.
어린 시절, 나는 라디오로 퀸의 노래를 수없이 들었지만, 그 시대에는 나도 에이즈와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 갇혀 있었기에 프레디 머큐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앨범을 사는 것조차 망설였던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지금은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이 글은 그런 미안함을 담은 고백이자, 편견을 넘어 다시 들려오는 그의 노래에 대한 헌사다.
다음 회차는 그런지록(Grunge Rock)의 아이콘이자, 짧은 생애로 전설이 된 커트 코베인. 그의 목소리에 담긴 시대의 분노와 고독을 따라가 본다.
참고자료
위키백과 - Bohemian Rhapsody
나무위키 - 프레디 머큐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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