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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Sep 20. 2024

여자 숙소에 남자친구 데려오지마

같은 숙소에 사는 몽골인 여학생 H 에게는 러시아 남자친구 D 가 있었다. 나와 동기가 처음 중국에 온 날 그 친구는 우리에게 웰컴디너 자리에 남자친구를 초대해도 되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같은 수업 듣게 될 친구 아니야? 같이 밥먹자.

지금은 길이 막혔지만, 고등학교때부터 러시아 횡단열차를 타보는 게 버킷리스트였던 나는 ‘러시아인 친구’ 를 중국에서 만나게 되는 것 자체로 설레였다. H의 남자친구라며 소개해준 친구는 키와 덩치가 매우 컸고, 큰 눈이 이유없이 무서웠다. (...) 타인에게 자신의 첫인상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을 본인도 아는지, 그는 처음 만난 한국인 두명에게 최대한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해주었다.


밥을 먹으며 만나게 된 계기를 들어보니, 한국 S 대기업 광고대행사의 러시아 지사에서 회사 동료로 만나 연인이 되었다고 했다. ‘와 신기하다, 이런 만남도 가능하구나.’, ‘중국어만 주구장창 배우겠거니 생각하며 왔는데 이렇게 되면 영어도 많이 늘겠는데?’ 당시 나의 모든 관심은 ‘언어’에 쏠려있었기에 모든 것이 기회처럼 느껴졌다. 온통 영어 배울 생각에 신이 난 나머지, 남자인 친구가 여자 다섯인 숙소에 찾아오는 것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웰컴디너를 같이 한 날 이후로도, 러시아 남자친구 D 는 매일같이 우리 숙소를 찾았다. 현관문은 완전히 닫을 시 밖에서는 열쇠 없이 못 열고 안에서만 열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는데, 열쇠 없는 D 가 언제든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여자친구 H는 단체 숙소임에도 불구하고 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H 와 D 는 하루라도 떨어질 생각을 안했고, 때문에 H 의 룸메이트 K 와 나머지 숙소구성원은 H 가 끼는 일정에는 D 도 무조건 끼워 함께했다. 아침 수업도 함께 등교하고 저녁도 여자 숙소에서 같이 먹는 일이 하다했다. 심지어 저녁을 먹고 서도 둘이 딱 붙어 같이 수업 과제를 하며 본인 숙소로 돌아갈 생각을 안 하는 날에는, 샤워 후 환복을 하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묶어올린 채 물을 뚝뚝 흘리며 방으로 들어가는 거실에서 어색한 인사를 나눠야 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곤 했다.


“언니. 언니는 D가 안 불편해?”


여느때처럼 숙소의 거실 큰 소파를 연인끼리 차지한 채 꽁냥대던 저녁, 방문을 닫고 동기가 나에게 한국어로 말했다.


“음... 적응돼서 그런가. 못참겠다 싶은적은 없었는데. 왜?“

“나는 불편해. 쟤 때문에 샤워도 편히 못하고 밤마다 중국어 공부한답시고 모여서 깔깔대는거 듣고 있으면 잠이 안와.”


잠귀도 어둡고, 내 일 아니면 크게 신경 안 쓰는 무던한 타입이라 ‘그러라고 하지 뭐’ 했던것들을 동기는 문제로 제기했다. 말을 듣고 천천히 곱씹어보니 ‘그렇긴 했네...’ 싶은 해프닝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문제가 없는게 아니었다. 문제를 삼지 않으면 트러블도 없으니 문제로 삼지 않은 것 뿐이었다. 설령 내가 진짜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았다고 해도, 공용공간 사용에 있어서 한명이라도 불편함을 느끼면 그건 분명 짚고 넘어가야하는 문제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끝방 여자애 L 이랑,  (H 룸메이트) K한테도 이 상황에 대해 물어보자.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음날 아침 동기는 이야기한 대로 L 에게 여자숙소에 남자가 매일같이 드나드는것에 대해 의견을 물었고, ’너희가 오기 전에도 이러한 상황의 반복이었어. 물론 불편했지. 하지만 이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은 없었어. 친하기도 했고 당시 숙소에 나, K, H 여자 3명이었거든.‘ 이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L 은 평소에도 매끄러운 스몰토크를 잘 했고, 본인만의 강단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린 면이 있었다. 심지어 모국을 떠나 유학생활을 한 지 6년이 다되어가는 입장에서,  매일 보고 지내야 하는 친구와 얼굴을 붉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룸메이트 K 는 L 보다 더욱 거절을 못 하는 성향이었기에 D 가 거실이 아닌 여자 둘이 쓰는 방까지 들어와서 수다를 떨어도 그냥 넘어갔다고 했다.


“다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던거네. 그럼 얘기를 한번 해야겠다.”

“오늘 저녁에 청소관련해서 이야기 하자고 하고, 전체회의를 해보는거 어때?”

“좋아.”




그날 저녁. 계획한 대로 우리는 주간 청소당번을 정하고, 몽골인 친구 H 에게 그간 남자친구로 인해 불편했던 점을 털어놓았다. 입을 연 건 나미비아 친구 L 였고, 물꼬를 튼 이야기 주제를 받아서 이야기를 풀어나간 건 나였다.


“너의 남자친구가 매일같이 여자 숙소에 드나드는게 불편하다고 느꼈어. 나와 동기가 그렇게 느껴서 L과 K에게도 물어봤는데 이제껏 편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 물론 남자친구 정말 나이스하고, 친구로서 재밌고,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것도 알아. 하지만 여기 주인은 우리 다섯명이지, D는 엄밀히 말하면 외부인이잖아. 너가 우리 숙소에 남자친구 안 데려왔으면 좋겠어."


(영어 잘하는 친구들 놔두고) 번역기로 돌려도 보고 단어도 찾아가며 나름 준비한 할 말을 뱉는데, 내가 말을 할수록 H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동안 자기가 피해준다고 생각을 못했었나보네, 그럴수있지.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을것까지 있나?‘


“여기 우리도 돈 내고 쓰는곳이야.”

내 장황한 스피치가 끝나자 L이 말을 얹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데. 데려오지 말라고?“

L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H는 차가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와 이거 좀 잘못됐다. 순간 생각했다.

내가 예상한 시나리오는 ‘잘 타이르면 H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과하고, 우리는 다시 하하호호 다섯이서 숙소를 쓴다...’ 정도 였는데. 본인의 남자친구를 이제껏 내색없이 반겼던 친구들이 사실은 불편해하고 있었단 사실에 그녀는 제대로 빈정이 상한 듯 보였다. 아침을 기어코 먹으려 하던 어느 날 새벽에 요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소음을 들었는지 “10시 이후에는 너희도 좀 조용히 해줄래?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톡 쏘아붙이곤 자리를 떴다. 문 닫았었는데 들렸을 줄이야, 알겠어. 아침 안 먹으면 되지 뭐... 멋쩍고도 쎄하고도 찝찝한 감정만 남은 시간이었다.




사람의 감이란 건 무서울정도로 정확해서, 쎄한 촉은 역시나 웬만하면 맞다. H는 해당 일이 있고나서 숙소에 남자친구를 데려오지 않았고, 숙소 멤버 중 나만 의식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일은 일이고. 맨날 볼텐데 얼굴 붉힐 필요 뭐가 있나.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했던 나와 달리 그녀는 한국인 두명과 집에 갈 때까지 겸상을 안 할 것처럼 굴었다. H와 동일한 수업을 수강하는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했을 때 웃어보이면 홱 돌려버리는 고개를 감당해야했고, 매번 수업 맨 앞자리에서 사이좋게 죽상을 하고 있는 커플 덕에 선생님께 'cindy랑 무슨 일 있었냐‘ 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쟤 회사 다니다 온거 맞아? 나이도 제일 많으면서, 이렇게나 이성적인 사고가 안된다고?‘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속을 뒤로하고 지내던 나날들이 이어지던 중, 동기가 제남으로 학교 행사를 가느라 하루간 숙소를 비운 날 여자 숙소 맨 꼭대기 층에 솔로몬 섬 친구들이 유학을 왔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친구, 스무살인 친구 등 나에게 전부 동생들이었다. 전학생이 새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 2층 숙소도 술렁였다.


“슈퍼에 있다는데 우리 마중나가자.”

“좋아. 가서 짐도 좀 들어주고 -”


룸메이트인 K와 H, 그리고 나. 셋이서 친구들을 마중나갔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통성명을 하는데, K 가 소개할때, 본인 소개할때도 싱글벙글 잘만 웃더니 내 소개를 할 때만 땅바닥을 쳐다보는것이 아닌가. H의 모습을 본 뒤로 나는 그 장소에 있는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다. ‘안되겠다. 이야기를 해야겠다.‘




“H, 나랑 얘기좀 하자.”


솔로몬 친구들을 숙소까지 바래다준 뒤, 우리 숙소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H를 붙잡았다. 한손엔 번역기를 켠 폰을 꽉 쥐고서.


“......“


H는 ‘할말 많지만 먼저 발언할 기회줄게’ 하는 눈으로 말없이 쳐다봤다. 매번 매정하게 돌려버리던 얼굴을 정면으로 보자마자 분해서 눈물이 나왔다. 정확히 ‘어쩌자고 내가 중국에 와서, 영어로, 몽골인이랑,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 중인가’ 라는 감정이 들었다.


“너가 왜 나를 매번 피하는지 나는 이해가 안가. 그때 다 풀었잖아. 선생님이 우리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것도 스트레스받고, 이런 일로 에너지 소모하는것도 싫어.”

여자 숙소에 남자가 들어오는 게 여러모로 편하지 않다, 하지만 너 남자친구 좋은 친군건 내가 잘 안다, 그치만 이런식으로 사람 없는취급 하는건 진짜 아닌것같다... 흐르는게 눈물인지 콧물인지도 모르게 줄줄 울며 속사포 랩을 했고, H는 내가 말이 끝날때까지 가만히 듣고있었다.


계단에서 꺽꺽거리고 있으니 위아래 다 울릴 것 같아서 1층 로비로 내려갔더니 H의 남자친구 D가 그녀와 저녁을 먹으려 숙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때문에 커다란 실루엣 밖에 안보이는 상태에서 남자친구까지 합류해 우리는 셋이 이야기를 나눴다.


H의 입장은 ‘한국인 유학생들 오기 전까진 남자친구가 자유롭게 드나들었는데 너네 오고 나서 사이가 갈라진 것 같아 싫었다’ 는 거였다. 또한 넷이서 입을 모아 공격적으로 본인에게 이야기하는 구도가 위협적이었다고. 남자친구 D는 앞으로 본인 관련된 문제면 여자친구가 아닌 자신에게 직접 말하라고 했다. 안티프리즈가 따로없는 둘의 눈물겨운 사랑 때문인지, 영알못 주제에 오지랖만 큰 덕에 누명 쓴게 억울해서인지 멈출줄을 모르는 눈물을 질질 흘리며 열심히 오해를 풀었고, 다행히 끝은 화해로 종결되었다. 이후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 셋은 서로를 마주할때면 평소보다 20% 밝은 텐션으로 대했다.


마냥 좋은 추억은 아니었지만 그때마저도 인생에서 지금 아니면 언제 몽골인, 러시아인과 영어로 싸워보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나는 항상 거절이 힘든 사람이었다. 타인의 불편보다 내가 불편함을 감수하는것이 심리적으로 편했기에. 그래서일까. 한국어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싫은걸 싫다고 말했을 때, 스스로 한뼘 성장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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