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에 케이팝 클럽이 있는데 갈래? 거기 한국 케이팝 틀어줌 ㅋㅋㅋ”
유학생활 6년차인 L은 동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이 작은 지역에 케이팝을 틀어주는 클럽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그 케이팝이 맞나 싶어 재차 물어봤더니 우리나라의 그 케이팝 맞단다. 평소 한국의 클럽 문앞에도 얼씬하지 않는, 춤을 싫어하는 나도 ’중국의 케이팝 클럽‘ 은 호기심이 생겼다. 살다살다 중국 클럽을 가보는 날이 오다니. 가보자! 나와 동기, 그리고 L은 수업이 있을 땐 잘 입지 않는 옷을 꺼내입고 장소로 향했다.
“세명? 대학생? 저쪽으로 들어가“
쭈뼛대며 도착한 클럽 입구는 보랏빛 조명이 강했고 기분나쁘게 달큰한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L이 유창한 중국어로 카운터 직원에게 나와 동기를 한국인이라고 소개해주니 ‘코리안이 케이팝 클럽을 오다니’ 표정으로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금속탐지기 문을 지나 코너를 도니, 곧바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다. 기다랗게 뻗어있는 테이블, 탑으로 시켜 마시고있는 술, 시끄러운 EDM과 시장바닥이 따로 없는 내부 소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끈적이는 테이블에는 여느 매장처럼 QR 코드 메뉴판이 있었다. 인식해서 메뉴를 보는데 온통 읽을 수 없는 글자와 맛없어보이고 비싼 안주들 뿐. 실시간으로 체력이 쭉쭉 빠져나갔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리고 집가고싶다.’
“음료수 하나씩 시키고, 과일 하나 시켜서, 다 먹을때까지 재미없으면 집에 가자!”
다들 느끼는 게 똑같았는지 머리를 맞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앞사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곳에서 앞에앉은 L 이 소리쳤다. 그렇게 우리는 도수낮은 병 칵테일 2개, 병맥주 1개, 그리고 과일을 시켜 나눠먹었고 소음에 뚝뚝 끊기는 대화를 나눴다. 직접 발로 걸어들어온 클럽은 태어나서 처음이기에 내부를 찬찬히 구경했다. 천장에는 클럽로고를 3D로 만든 모션그래픽을 빔으로 쏴주었고, 벽면에는 ’K-POP‘ 이라고 크게 LED 조명이 붙어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맨 앞 메인 스테이지에선 한 사람이 디제잉을 하고있었고, 즐겁다는 듯 저마다 웃으며 술잔을 부딪히는 사람들, 그리고... 구석에 젊은 남자 둘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앉은 쪽에서 시선이 자꾸 걸리는 방향에 앉아있던 그들은 둘이서 다 먹기에 버거워보이는 큰 탑으로 되어있는 술을 나눠마시고 있었다. 한명은 짧은 머리에 흰 티, 한명은 검은색 모자, 긴 곱슬머리, 검은 티를 입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또래다. 우리같은 애들인가보네.’ 나와 반대편에 앉아 그들을 보지 못하는 우리 테이블 친구들에겐 말을 꺼내지 않고 혼자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마르고,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에게 항상 호감을 느껴왔다. 듄의 티모시샬라메, 기묘한이야기의 핀울프하드, 그리고 잔나비의 최정훈... 좋아하고 보면 다 장발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애초에 소나무로 태어난 듯 하다. 무튼 취향이 이렇기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저 멀리의 장발남이 계속 신경쓰였던 것은 사실이다. 스스로 나름 티 안나게 흘끔댔다고 생각했는데, 시선을 거두고 흥미로운 토픽으로 열혈수다를 떨던 우리에게 하얀색 반팔티를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심심한데, 같이 놀지 않을래? 우리 두명이야”
훤칠한 키, 부드러운 인상. 가까이 보니 배우 김준한이 20대에 이렇게 생겼을까 싶은 얼굴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하나같이 ’재미있는 컨텐츠 하나 생겼다‘ 표정이었고 합석을 수락했다. 흰 티가 손짓을 하자 모자를 푹 눌러쓴 장발 친구가 걸어와선 내 옆자리에 앉았다. 눈여겨본 남자가 내 옆자리로 테이블을 돌아와서 앉는다. 이게 바로 운명이라는 건가. 제정신까지 한국에 두고 온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알고보면 흘끔이 아닌 뚫어져라 쳐다봤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는 전제따위는 생각도 않고. 그렇게 우리는 자기소개를 하고, 술게임을 하고, 둘이서는 많아보였던 탑으로 된 술을 마시고, 번역기를 쉴틈없이 돌려댔다. ‘VPN 어플 안깔려있는 놈들 접어‘, ‘모국어 중국어 아닌 사람 접어’... 높게 솟은 술탑은 시꺼먼게 기네스인가 싶었는데 체리콕이었다. 내옆에 앉은 장발남은 내가 본인을 의식했다는 것을 아는 듯 나와 딱 붙어 술을 마셨다. 처음보는 주사위 게임을 가르쳐 줄 때도 굳이 손을 겹쳐 설명해주는 과한 친절함에 ’기분탓인가‘ 하며 스르륵 포개진 손을 빼기를 몇번. 중국어, 영어, 한국어가 난무하는 왁자지껄한 테이블에서 그는 내쪽으로 번역기를 돌린 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나 너 좋아해
뭐? 귀가 실시간으로 달궈지는 게 느껴졌다. 너 나 알아? 언제봤다고 나를? 당황해서 껄껄 웃다가 번역기를 돌려 보여줬다.
갑자기?
갑자기 말하는거 아니야. 잘 맞을 것 같아. 드라마여도 전개 빠르다고 욕먹을 서사를 꾸역꾸역 이해시키려하는 그를 옆에 두고 나는 상황이 너무 웃겨서 셀카나 찍자고 했다. 얘들아 얘가 나 좋아한대 ㅋㅋㅋ 너 사진찍는거 좋아해? 셀피? 사진찍자 여기봐봐.
우리는 새벽 2시까지 끝도없이 리필되는 체리콕을 마시며 신나게 밤을 즐겼다. 장발 남자애는 주량을 자랑하려 쉴틈 없이 마시다 만취했고, 나 포함 나머지는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모든 가게의 영업이 일찍 종료되는 중국에서는 도시에서 떨어진 작은 클럽도 예외가 없었다. 잔뜩 신난 상태로 헤어지기에는 아쉬워 2차 장소를 모색했고, 흰 티 남자애가 먼저 제안을 했다. 너희 학교 운동장에서 마시는 건 어떻냐고. 개방된 장소, 비척비척 술취한 몸을 기숙사까지 끌고 갈 필요도 없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와 L, 장발남은 택시를 타고 이동했고 나의 동기와 하얀 티는 그의 개인 바이크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뻥 뚫린 운동장에 깜깜해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는 잔디밭에 앉아 우리는 흰 티가 박스 째 들고온 병맥주를 나눠마셨다. 선선한 새벽 공기, 겨울냄새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바람, 포장마차에서 사왔다는 이름도 기억 안나는 술안주까지 완벽했다. 장발남은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를 느리게 중얼거리다, 앉아있는 나에게 헝클어진 머리를 기대다, 맥주 병이 들어있던 빈 박스에 속을 게워냈고 우리는 그것마저 웃기다며 깔깔 웃었다. 보통 무리하면 힘들어하는 내색을 보이기도 마련인 것을, 그는 종종 있는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입을 쓱 닦고 운동장 잔디에 털썩 눕더니 누워보라고, 별이 잘 보인다고 했다. 누운 채로 손목을 잡아끄는 힘에 따라 잔디밭에 나란히 누워봤다. 운동장 잔디에 누워본 지가 얼마나 오래더라. 차가운 잔디가 머리카락에 스몄다. 올려다본 어둑하니 푸르스름한 하늘에는 말대로 하얀색 별이 몇개 떠 있었다.
좋다. 잔디밭에 꽂아둔 맥주 대여섯 병, 계속해서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 앉아서 수다떠는 친구들의 목소리...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떠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우연한 만남도 생각지 못한 인연도 없었겠지.
이 날 우리는 새벽 6시 동이 틀 때까지 술을 마셨고 땅이 빙글빙글 돌 때까지 운동장에서 뛰고, 걷고, 눕고 놀았다. 재학생이 아니었던 그들은 신데렐라마냥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는 7시가 되기 전 가보겠다며 동기를 태웠던 흰 티의 바이크를 끌고 사라졌다.
길고 얇은 곱슬머리가 부드러웠던 그 장발남은 긴 머리가 날렵한 이목구비에 잘 어울렸고, 하얼빈 사람이며, 졸업 후 바텐더로 일을 하다 쉬고있는 중이라고 했다. 나와 그는 이후에도 위챗을 통해 종종 연락했고, 학교와 사는 곳이 가깝다는 이유로 커피를 마셨고, 종종 학교로 오토바이를 타고 와 운동장에서 수다를 떨었다. 그는 자주 술을 마셨고 취중에 전화를 걸어 좋아한다, 너는 나를 생각하냐는 식의 말을 돌림노래처럼 반복했고 나는 지겨우니까 더이상 연락하지말라고 답변했다. 취중고백을 한 3번 받았을 때쯤, 난 너의 이런 모습이 싫다고 보내니 더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사랑이라 말할 순 없지만 즐겁고 설레었던 기억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교과서를 펴놓은 책상앞에 앉아 그 친구의 모멘트에 올라온 차 마시는 사진을 보며 ‘생머리도 괜찮네.’ 생각하던 기억,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누가봐도 놀게 생긴 남자애랑 엮여서 뭐하냐’는 비판을 듣던 기억, 모든걸 게워낼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기분좋게 취해 잔디밭에 누워있는 나의 손을 취한 척 잡던 기억, 얇고 긴 손가락.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와의 연락은 한번 끊긴 이후로 한번도 없었고, 그랬기에 짧고 강렬했던 기억으로 오래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