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웃고 먹고 마시며 즐겼던 반년간의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매일 눈을 뜨면 보이던 풍경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아침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집으로 가는 비행기는 하루하루를 알차게 즐기고 싶은 마음에 늦은 시간대로 예매했다. 공항이 위치한 제남이라는 곳은 교환학생 첫날 밟아만 봤지, 구경을 한다거나 커피를 마셔본 적은 없었기에 간단하게 즐기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침 일찍 학교 프로그램이 있어 나가야했던 끝방 친구 L 과 동기를 방문앞에서 추레한 몰골로 마지막 포옹을 했다. 내 책상에는 동기가 밤새 만든 뜨개인형과 엽서를 한바닥 채운 손편지, 상하이에서 조용히 사온 마그넷이 놓여있었다. 몇개월 한 몸처럼 붙어다니던 생활들이 머리를 스쳤다. '나 가고 새로 오는 분은 적어도 나보단 더 잘 챙겨주는 사람일거다' 고 말했었는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매트리스 셀프로 빼야 한다는 경비아저씨 말씀대로 침대 정리까지 마치고, 중국에서 먹는 최후의 만찬으로는 매일 가던 단골 밥집의 가지튀김을 택했다. 우리가 저 멀리서 가게로 걸어오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시던 사장님은 내가 마지막이라고 하니 작별 선물이라며, 밥값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눈물이 날 뻔 한걸 꾹 참고 숙소로 돌아와 포스트잇에 편지를 적어 피크닉같은 음료와 함께 전달드렸다.) 배를 든든하게 채운 뒤엔 한국에 돌아가 지인들에게 나눠줄 주전부리로 한 바닥을 꽉 채우고 친구들이 나눠준 인형과 기념품 등을 쑤셔넣은 캐리어를 몇번이고 더 열었다 닫으며 정말 빠진 게 없는지 확인했다. 진짜 끝이구나. 삶에서 가장 경험의 밀도가 높았던 나날들을 뒤로하고 떠나려니 인생의 한 챕터가 끝나는 기분이었다.
일찍 공항에 도착하여 느긋하게 여행 겸 산책을 하려 했던 나의 계획과는 달리, 생각보다 시간이 타이트했다.
하물며 막히는 차를 뚫고 낯선 글자들에 끝까지 헤매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탑승장 라운지에는 그 흔한 프렌차이즈 카페 하나 없었다. 기내용 가방에 상하이에서 사온 르라보 바디워시를 통째로 챙겨온 탓에 피같은 돈을 쌩으로 날리고, 빈 속과 빈 지갑으로 연착이 된 인천행 비행기를 3시간 가까이 기다렸다.
중국에서 한국으로는 딱 올때만큼의 짧은 비행시간을 거쳤다. 걱정과 착잡함이 뇌를 장악했던 출국 비행기와는 달리 입국 비행기에서는 이상하리만치 후련했다. 모든게 잘 풀린것도 아니고, 꼬일까봐 걱정했던 것들이 예상처럼 꼬였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열심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 홍보대사로 뉴진스가 발탁된 건지, 한복을 입은 5명 사진 위 영어로 '웰컴 투 코리아' 를 써놓은 공항 포스터를 보니 긴 꿈에서 깬 듯했다. 여러번 지연 된 비행기에 몇시간을 입국장에서 기다리셨다는 부모님은 딸의 귀국을 피곤한 내색도 없이 맞아주셨다. 고생했다, 피곤하고 배고프지, 가서 밥먹자 반찬해놨어. 양손에 잡고있던 캐리어 손잡이를 가로채고 빈 손에 생화 꽃다발을 쥐어주며 엄마는 말씀하셨다. 아빠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나는 집에 갈 때까지 눈 한번 붙이지 않고 내가 모르는 세상이 얼마나 넓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엄마가 물었다.
"만약에 다시 가라고 하면 갈거야?"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무조건요"
귀국 일주일 후로는 밀린 업보 처리에 전념했다. 파견교환학생 소감문을 작성하고, 학교 담당 교수님과 학과장님을 찾아가 상담과 필요서류 사인을 받고, 동난 잔고를 채우기 위해 단기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약 1년 반동안 모교를 찾지 않은 학생을 교수님과 학과장님은 반갑게 맞아주셨지만 결국 졸업은 우려한 바와 같이 내년으로 밀렸다.
24년 2학기, 한학기를 추가로 강제 휴학하게 된 상황에서 고민 끝에 돈과 실무경험을 쌓을 수 있는 인턴을 택했다. 근무기간은 최대 6개월, 저명한 기업의 자리를 얻고자 밤낮으로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봤다. 매일같이 구인구직 플랫폼을 쥐잡듯 물색하던 타이밍에 국내 대기업 K 계열사에서 인턴 모집 공고를 올렸고, 중국 생활 시절 알리페이와 제휴한 해당 기업의 결제서비스를 사용했던 경험을 풀어낸 이력서로 합격하여 현재 판교 K 사로 출근하는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