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니 그걸 이제 말해주다니요

by 운동화

눈이 나풀나풀 내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흩날리는 눈이 머리에 내려앉았다. 여행을 축복해주는 꽃가루를 맞는 것처럼 손바닥을 하늘로 펴 눈송이를 받으며 흡족한 웃음을 머금고 공항에 들어섰다. 출국 수속을 마친 뒤 면세품 인도장을 찾아 나섰다.


이번 여행에 처음으로 인터넷 면세점의 존재를 알게 됐다. 옆자리 동료가 스사사 회원인데 이 스사사로 말할 것 같으면 여행계의 얼리어댑터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로 여행에 관한 깨알 정보를 공유하며 스마트컨슈머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지혜를 전수하는 모임(동료의 피셜)이었다. 동료와 겨울 휴가 얘기를 하다가 이번에 공항 면세점 가면 시계나 좀 사야겠다는(오해 마시라, R사 시계 같은 명품 아니다. 나는 스*치라는 실용성 높은 시계를 사려 했다) 내 말에 동료는 화들짝 놀라더니 시계를 왜 공항 면세점에서 사냐면서 인터넷 면세점이 더 저렴하니 실물은 시내 면세점에서 구경하고 같은 물건을 인터넷으로 구매하라고 했다.


인터넷에서 구매하라는 동료의 말을 듣고 그럼 면세품이 택배로 집에 올 텐데 그게 어떻게 면세가 되냐는 나의 질문에 동료는 아까보다 더 충격을 받아 똥그래진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제야 질문자의 수준을 파악했다는 표정으로 찬찬히 면세품 구매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동료의 가르침대로 물건을 사기로 약속하고 퇴근하는데 동료의 마지막 조언이 어떤 사건의 복선처럼, 신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어 내 귓전에 날아와 박혔다. “새로 생긴 ○○면세점이 있어요. 신생이라 규모는 작은데 홍보하느라 할인율이 높으니 꼭 그 사이트에 가서 사도록 해요.”


스마트한 동료 덕분에 나는 스*치 시계를 여러 할인을 받아가며 과연 가장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고, 사이트 화면을 이것저것 딸각거리다가 계획에 없던, 원숭이 달린 작은 여행용 크로스백 하나도 저렴한 가격을 이유로 사게 되었다. 언제나 하나의 소비는 이렇게 꼬리를 물고 다른 소비를 창출하기 마련.


인도장 위치가 적힌 지도를 출력해 손에 들고 면세구역에서 돌아다니던 나는 스사사 회원이 가르쳐주지 않은, 인도장에서 면세품 찾는 법은 숙지를 못 해 허둥대긴 하였으나(해당 면세점 번호표도 뽑아야 하고, 아무 데나 서지 말고 해당 면세점 앞에 가야 하고, 번호표를 내고, 신분을 증명하고, 물건을 확인하고 받는 그 모든 절차) 도착지까지 면세품 포장을 풀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무사히 물건을 건네받았다. 이제 마음 편히 출발 게이트를 찾아가 앉아있기만 하면 되었다.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니 이미 내가 타려는 비행기가 게이트 앞에서 탑승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밖을 보며 ’와…. 눈이 참 많이 오네.‘라고 생각하는데 눈이 정말 너무너무 많이 오는 게 아닌가. 쌔-한 기운이 몸을 휘감는 동시에 공중에서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폭설로 인해 항공기 출발이 지연된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은 이후에도 항공사마다 줄줄이 이어졌다. 게이트 여기저기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대기하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게이트에서 대기한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눈발은 잦아들기 시작했고 제설작업도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주변 게이트에서 다른 항공사들이 탑승 수속을 재개했다. 우리 게이트의 승객들도 기대에 찬 얼굴도 탑승 안내를 기다렸다. 그러나 다른 게이트에서 탑승이 완료될 때까지 이쪽 게이트에선 아무런 안내가 없었다. 뭔가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시 삼십 분 후 갑자기 탑승 게이트의 전광판에 결항 공지가 뻘겋게 떴다. 승객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왜 다른 항공사는 다 출발하는데 우리만 결항이냐, 결항이면 미리 알려줘야지 왜 몇 시간씩 사람을 대기하게 만들다가 이제야 공지를 하는 거냐 사람들의 아우성이 이어졌다.


항공사 지상직 직원들은 진땀을 흘리며 사람들에게 다시 출국장으로 나가야 한다고 안내했다. 사정은 이러했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장들은 하루 동안 근무하는 최대 시간이 국제법으로 정해져 있다. 기장의 근무 시간은 기장의 컨디션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한 법적 조치로 비행기의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법으로 엄격하게 규제한다. 하필 이날 우리 비행기의 기장은 먼저 다른 항공 스케줄을 소화한 뒤였고 일본으로 향하는 짧은 마지막 비행만 마무리하고 하루 일정이 끝나야 했다. 그런데 공항 대기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하루에 근무해야 하는(대기 시간 포함) 최대 시간을 넘긴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어 항공사는 대체할 기장을 알아보았으나 하필 그날 운항을 대신할 수 있는 기장이 없었다. 결국 항공사는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결항을 결정한 것이다. 승객들의 짐도 싣고 승객들은 탑승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비행기가 버젓이 옆에 서 있는데도 결항을 결정하는 일이 항공사로서도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다시 출발 카운터로 나가서 이후 일정을 안내받으라는 직원들의 말에 여기선 방법이 없으니 항의하던 승객들도 일단 카운터로 나가기로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문제는 시작되었다.


공항 직원들이 오더니 다시 출발 카운터로 나가려면 산 면세품을 모두 반납하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각 면세점 직원들이 카운터로 와서 면세품을 확인하고 받아 갈 테니 기다리라는 안내였다. 과연 머지않아 면세점마다 직원들이 기다란 테이블과 카트 같은 것들을 끌고 나타나서 구매한 면세품 목록을 확인하고 다시 회수해가는 절차가 진행됐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면세품을 반납하고 사인을 하고 다시 출국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기다림에 지쳐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었으므로 우리 면세점(소수자로서 느끼는 소속감인가? 우리라니.)이 어딨는지 사람들의 큰 어깨 뒤를 까치발로 기웃거리며 테이블들을 살폈다. 또 살폈다. 또또 살폈다. 없다. 우리 면세점만 없다. 뭐지? 좀 늦게 오려나?


그렇게 기다리기를 한 시간 반. 그 넓은 게이트에 항공사 직원은 물론 공항 직원도 가고 면세점 직원들도 다 철수한 뒤 덜렁 나 혼자 남았다.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이십여 분 전 지나가신 미화원 한 분. 혼자 게이트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청소 카트를 밀고 지나가신 뒤로는 생명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삼십여 분 전에도 나는 철수하는 직원에게 우리의 면세점이 오지 않았음을 말했는데 직원은 바빠서 늦게 올 수 있다면서 다른 데 다니지 말고 여기서 꼭 대기하다가 반납하고 나가셔야 한다고 했다. 나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 아니라 법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사람이라 법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다리를 꼬고 앉아 기다렸다. 방광이 차오르고 화장실이 가고 싶었지만, 그 사이 혹시나 면세점 직원이 왔다가 나를 못 만나고 돌아갈까 싶어서 화장실도 못 가고 다리를 꼴 수밖에 없었다. 눈이 그친 창밖은 어느새 깜깜한 어둠에 휩싸였다.


그런데 갑자기 공포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텅, 텅, 텅, 텅. 저 멀리서부터 복도 불이 하나씩 내 쪽으로 다가오며 꺼지는 게 아닌가. 나 혹시 지금 좀비 영화 같은 꿈속인가? 그렇다면 그냥 지금 오줌을 쌀까? 꿈속에서 오줌싸면 운수대통이라던데……. 이런 생각을 하는데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 이제 소리를 지르며 깨면 되겠군.


“엄마야!” 소리를 내지른 건 상대방이었다. 그럴 수밖에. 나는 그림자를 아까부터 보고 있었지만, 그쪽은 지금에야 나를 발견했으니.


“아니, 여기서 뭐 하세요?” 그녀는 정복을 입은 공항 직원이었다. 내가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녀는 기다리라면서 어딘가로 무전을 쳤다. 그리고 뭐라 뭐라 하더니 다시 무전을 쳤다. 상대방이 뭐라 뭐라 했다. 무전을 끄고 그녀는 딱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면세점이 소규모인데다가 신생이라서 이런 경우를 잘 몰랐나 봐요. 다 퇴근하고 면세점 문도 닫았다네요.”

“그럼 전 어떡해요? 못 나가요?” 당황한 나의 외침에 그녀는 잠시 생각에, 아니 내적 갈등에, 아니 어쩌면 무전으로 나눈 대화의 복기에 잠겼다. 그러곤 면세품으로 무엇을 샀는지 내놔 보라고 했다. 나는 크로스백과 시계를 내밀었다. 순간 스위스 R 시계가 아닌 것이 약간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모두 십만 원이 되지 않는 나의 면세품을 보더니,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짧은 숨을 흠- 뱉고는 갑자기 크로스백의 태그(Tag)를 잡아 뜯었다. 으엑? 뭐 하시는 거예요? 대꾸할 틈도 없이 이번엔 플라스틱 시계 상자를 열어 시계의 태그 역시 뜯었다. 그리고 면세점 비닐백과 시계 상자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턱과 넋이 빠진 채로 입을 크게 벌리고 그 장면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가 내게 다가와 크로스백을 유치원 등교하는 딸에게 하듯 몸에 걸어주고, 내 팔목을 잡고는 새 시계를 팔목에 차 주었다.


“이제 나가세요.”

“에?”

“여기서 밤을 새우실 수도 없고 면세점은 이미 퇴근해서 물건을 회수할 수도 없으니 그냥 썼던 물건인 것처럼 가지고 나가세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별수 없죠, 어쩌겠어요? 만약 세관에서 잡히면 ‘그럴 리 없겠지만’(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제가 이렇게 했다고 하세요.”

“아니, 이럴 거면 진작 말해주셨어야죠! 제가 혼자 여기서 얼마나 기다린 줄 아세요?!!!”

“원래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지금은 상황이 불가피하니까, 그리고 제가 여기 계신 줄 알았나요? 저도 불 끄러 오다 본 건데…. 아니 그리고 아무도 없으면 어딜 찾아가서 물어보셔야지 여기 계속 계시면 어떡해요?”


아놔…. 이럴 줄 알았으면 오줌이라도 싸러 갈걸. 내가 있던 탑승동 가지에 마지막 불이 꺼지고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터덜터덜 직원을 따라 출국장으로 나갔다. 한참 동안 혼자 바보짓을 한 나를 한심해하며 출국장을 나오니 시간은 한밤중이었고 나는 차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묻기 위해 만신창이가 되어 항공사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런데 카운터를 발견한 나는 갑자기 승자의 기분이 되어 씨익 웃고 말았다. 그곳엔 적어도 두 시간은 전에 나보다 먼저 면세품을 반납하고 나갔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엉겨 붙어서 항공사 직원들에게 대판 항의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 조용히 탑승동에 앉아있던 게 나았을지도 몰라. 오줌이나 싸러 가자.


늦은 것 같아 조바심이 나는 순간도 지나고 보면 큰 차이가 없다. 고3때는 재수하는 일이 엄청난 실패처럼 느껴지지만, 한 해 늦게 입학하는 것이 사회에 나가면 큰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하철, 버스를 눈앞에서 놓쳐 발을 동동 구르지만 막상 좀 늦어도 약속을 못 지킨 미안함을 정중히 사과하면 되지 내 존재가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다. 옆 테이블의 식사가 먼저 나오면 화나지만 늦은 만큼 배가 고파 밥은 더욱 꿀맛이다. 고속도로서 먼저 가려다 골로 먼저 가는 경우를 우리는 왕왕 목격한다.


아무도 없는 탑승동에 고요히 홀로 앉아 눈밭에 홀로 서 있는 비행기와 독대하는 경험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다. 조바심 내지 말고 화장실 가서 편히 일을 보고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창밖 풍경을 더 즐길 걸 그랬다. 조바심이 안대가 되어 지금의 만족을 가리지 않게. 결국 우리는 내일의 카운터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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