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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티브 Antibes Sep 26. 2021

샤갈이 잠든 예술인 마을과 담쟁이 단풍: 쌩뽈의 늦가을

Saint-Paul-de-Vence의 가을

바람이 분다.

이미 금요일 저녁부터 무장해제된 붕 뜬 마음과 몸으로 맞는 주말 아침. 

침대를 채 벗어나지 못한 채 연신 침대 끝과 끝을 오가는 게으른 뒹굴 뒹굴. 


열어 놓은 창문틈으로 갑자기 휙 들어닥친 바람 한 줄기에서 느껴지는 계절의 변화에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아직 초록빛이 더 대세인 세상이지만, 마음은 벌써 만추로 달려가고 있다.

갑자기 온 세상이 알록달록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을 만추의 산책길을.




가을이 아름다운 도시는 참으로 많을 터이나, 성벽으로 둘러 쌓인 지중해 중세 마을, 그것도 고풍스러운 산속에 우뚝 솟아 있는, 담쟁이로 뒤덮인 도시는 많이 없을 듯 싶다.

여러 유럽 도시를 섭렵해 봤지만, 쌩뽈 만큼 담쟁이 단풍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마을은 없었다.

계절이 바뀌면 새 옷을 갈아입듯이, 쌩뽈도 가을 옷으로 갈아입는데, 딱 들어맞는 그 곳을 위한 맞춤복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풍 옷을 기품 있게 입고 있었던 그 곳.



공교롭게도 쌩뽈 (Saint-Paul-de-Vence)을 방문했던 계절은 모두 가을이었다.

아마 그래서, 쌩뽈하면 담쟁이 단풍이 떠오르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성벽으로 둘러 쌓인 예술가 마을인 만큼, 담쟁이 단풍도 예술적이다.

무심히 성벽을, 그리고 집담들을 덮었을 뿐인데, 조용히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쌩뽈은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명성이 자자하다.

샤갈이 살았었고, 샤갈이 그 인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다양한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예술가의 마을로 거듭나도록 큰 공헌을 했다고 전해 진다.

지금은 마을 전체가 고성 같은 중세도시에 현대미술과 조각, 장치미술을 하는 예술인들도 또 다시 북적이는 그곳.

과거와 현재의 예술이 공존하는 시간을 잊은 예술가 마을인 셈이다.




쌩뽈 마을 입구 즈음에 들어서 있는 고급 부띠끄 호텔이 문득 떠오른다.

샤갈, 피카소, 마티스 등 많은 예술가들이 즐겨 묵었다고 전해지는 La Colombe d'Or 호텔. 

특히나 샤갈 등이 이 곳에서 식사를 자주 한 것으로 유명한데, 명성도 돈도 없던 무명 시절에는 그림을 맡기고 식사를 하곤 했었다고.





넉넉한 백발의 할아버지들이 마을 입구에 옹기 종기 모여 있다. 어디에도 위협의 요소는 찾아볼 길이 없고, 푸근하고 정겨운 시골 마을의 풍경에 만추의 공기를 온몸으로 흡입하며 천천히 산책을 즐긴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평평한 (아니 꼭대기도 좁지만 평평하다.) 마을 입구를 지나서 가을빛이 완연한 쌩뽈 등반을 나셨다.  


사실 쌩뽈에서는 길을 잃기가 힘들다.

메인 도로? 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마을 입구에서 부터, 성벽을 발 아래에 둘 수 있는 마을 꼭대기까지, 쭉 한 길을 따라 걸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 길을 따라, 양쪽으로 들어선, 여러 갤러리, 아뜰리에, 그리고 마을의 다양한 풍경들과 집들.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여기는 예술가 마을이야' 라고 조용히 외치고 다니는 메아리가 들리는 듯 하다.



마을이 온통 돌들로 지어진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흙을 밟을 기회가 별로 없는데, 고지를 향한 소박한 등산길?에 중간중간 들어선 기착지에서는 흙냄새를 맡을 기회가 또 제법 있다. 그 중간 기착지에는 또 중세마을의 흔적인 분수와 듬직한 아틀리에가 자리잡고 있다.


좁은 중세 골목길과 중세 계단길. 그 주변으로 가로수 처럼 쭉 들어선 고급스러운 아뜰리에들과 갤러리들. 늘 거기에 있었던 것 처럼 자연스러운 조합이 '마을 자체가 예술품'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는 곳이다. 또 쉴틈 없이 다양한 볼거리들이 눈 앞에 가득 찬다.


특별히 조명을 설치하지 않아도, 좁은 골목길 사이 들어선 중세건축물 틈새로 애써 자리를 잡는 자연 조명, 햇빛의 예술이 심상치 않다. 빛이 자리잡은 곳은 자연스럽게 포인트가 되고, 확연히 다른 색감으로 그림을 완성한다. 지중해변의 강한 빛도 빛이지만, 이런 중세마을이 만들어 내는 자연스러운 빛의 예술에도 예술가들이 반한 것이 아닐까. 많은 인상파 화가가 프랑스 남부를 거쳐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만추라는 단어만으로도 괜히 쓸쓸한데, 문득 마을 묘지가 눈에 들어온다.

어렵지 않게 샤갈이 잠든 곳도 지나친다. 샤갈 인생의 후반부를 함께한 부인, 그리고 그 부인의 가족 (오누이 지간)도 함께 잠들어 있는 그 곳.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보라빛이 쨍한 꽃이 그 곳에 함께 하고 있었다.



마을 묘지라는 으슥한 느낌보다는 예술가들의 영혼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그 곳.

괜히 사색이 꼬리를 물고, 머물면 머물수록 쓸쓸한 마음이 오히려 잔잔해 지는 묘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그 곳을 조용히 나선다.



하마터면 문을 열고 들어갈 뻔 했던 어느 집 앞의 단풍 조차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젠 너무도 익숙한 아뜰리에. 건물 통째로 아뜰리에가 들어선 중세건축물 앞에서 또 잠시 서성인다.



쨍한 담쟁이 단품을 등지고 잔잔한 등산길을 마무리할 때 즈음, 나타나는 현대풍 갤러리. 

이제 다시 평평해 진 것을 보니, 마을 꼭대기 즈음인 듯 하다. 


마을 꼭대기에는 수 많은 조형물들이 전시장 처럼 자리 잡고 있다. 오픈된 공간이 마치 현대조각품 전시장 같은 그 곳. 늘 보던 풍경이지만 또 볼 때마다 새롭고, 지난번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설치미술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꼭대기에 다다른 만큼, 쌩뽈 주변을 관망하는 재미도 있다. 

꼭 낙엽은 태워야 맛인지, 낙엽 태우는 냄새가 먼 곳부터 불어온다. 낙엽 태우는 연기인지, 안개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묘한 연기가 주변을 한 줄기 강처럼 흐른다. 서서히 해도 뉘엿뉘엿 저물고, 고즈넉한 중세마을의 저녁이 천천히 밤으로 이어진다.


어느 11월. 온통 담쟁이 단풍으로 뒤덮여 있던 중세 마을이 한 폭의 그림처럼 조용히 마음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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