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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Oct 23. 2021

화성학 입문은 눈치껏

주의: ‘야매’임



어린 시절을 보낸 아파트 상가에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우리 옆집 할머니의 딸이 운영하는 곳이라 엄마는 쉽게 영업을 당했고, 덕분에 언니들은 매일 네모난 초록색 가방을 들고 거길 드나들었다. 하지만 엄마의 강요도 나에겐 통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놀기 위해 필사적으로 학원을 거부했다.


하지만 단 한 번. 엄마가 두살배기였던 나를 데리고 피아노 학원에 들어가봤다고 한다. 어린 아기를 피아노 앞에 앉혔더니 어디서 봤는지 두 손으로 꽝꽝 내리치고 악보를 척 넘기고, 다시 꽝꽝 내리치고 악보를 넘기는 시늉을 했다고. 그때 엄마가 ‘얘가 피아노를 좋아하나?’ ‘혹시 소질 있나?’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 주어서 감사하다. 억지로 학원에 다녔다면 난 어쩌면 피아노를 증오했을 지도 모른다. 정해진 대로만 하는 똑같은 일을 꾸준히 반복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다. 주어진 악보를 매일 따라쳐야 했다면 아마 학원을 오래 다니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세대지만 그때에도 교실마다 풍금이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은 젓가락 행진곡이나 고양이 왈츠 같은 다소 고전적인 연탄곡을 연주했고, 피아노를 전혀 몰랐던 나는 매일 풍금 앞 1열을 꿰차고 서서 침을 삼키며 그걸 지켜보았다. 그중 아주 독보적인 풍그미스트, 아니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사전에는 ‘organist’로 나옴) 우리반 최고 뮤지션이었던 그 친구는 당시 처음 들어보는 연탄곡을 연주했는데, 높은 음역 파트는 꽤 쉬워서 자기 단짝에게 가르쳐주고 본인은 난이도 있던 낮은 파트를 쳤다. 빠른 템포의 단조로 된 그 곡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면 평소랑 똑같은 교실도 격정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나만 특별하게 느낀 건 아니었는지 그 친구가 연주를 시작할 때마다 다른 아이들도 달려와 넋을 잃고 보았다. 물론 그 중 1열은 나다!



그 아이는 독주도 자주 선보였다. 대부분 간단한 동요였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곡은 양희은 님의 ‘아침 이슬’이었다. 선생님이 음악 시간에 가르쳐주신 노래라서 난 이미 계이름까지 줄줄 외운 상태였고, 연주할 때 오른손이 그 멜로디를 담당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뮤지션 친구가 아침 이슬을 연주할 때마다 그 아이의 왼손만 쳐다보았다.


'대체 무얼 치고 있는 거지?'


악보에는 멜로디만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계이름 정도 연주할 줄은 알았으니 멜로디 파트는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왼손이 쿵짝짝 쿵짝짝 3박자를 연주할 때 누르는 화음은 어떤 규칙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언뜻 보면 비슷비슷한 건반을 누르는 것 같았지만 소리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친구가 그 곡을 연주할 때마다 뚫어지게 쳐다보고 또 쳐다본 끝에 규칙을 발견했다.




오른손 멜로디에 나온 음이
왼손 화음에 포함된다!







아래 악보에 같은 음을 같은 색깔로 표시했다. 멜로디에 나온 음이 화음에 포함되는 게 잘 보인다.


클릭하시면 더 잘 보입니다 :)




내가 배웠던 ‘아침이슬’은 도미솔, 도파라, 시레솔로만 이루어졌고 각각의 화음이 주는 느낌이 다 달랐다. 도미솔’은 시작과 끝을, 시레솔’은 다음에 뭔가 더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도파라’는 잘 설명하긴 어렵지만 중간을 이어주는 느낌이었다.



슬슬 나도 쳐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친구의 손에서 몇 번이나 봤던 대로 혼자 따라해보기 시작했다. 추측한 규칙대로 천천히 건반을 누르자 악보가 없어도 내가 들었던 그 음악이 살아났다. 나는 한글을 처음 깨쳤을 때처럼 머리속이 환해지는 걸 느꼈다. 드디어 나도 '아침 이슬'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김민기 선생님 만세! 양희은 선생님 만세!)





그후 나는 아무도 풍금을 치지 않는 순간을 노려 혼자 아침이슬을 연습했다. 그러다 보니 ‘도미솔’(다장조의 1도), ‘파라도’(다장조의 4도), 솔시레’(다장조의 5도)로 이루어진 주요3화음의 쓰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학교종이 땡땡땡이나 작은별, 나비야 같은 곡도 추측한 대로 쳐 보았다. 불협이 들리면 맞는 소리를 찾느라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이제는 교회 피아노 반주 소리가 남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는데, 어릴 때라 개념이 정확하진 않았겠지만 단조로운 찬송가의 경우에는 어렴풋이 1도, 4도, 5도의 화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글을 몰랐을 적엔 한글이 2D 그림기호에 불과했다가 읽는 법을 알게 된 후 글자가 생생한 4D 서사로 펼쳐지던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음의 세계는 정말 놀라웠다. 규칙에 따라 음악이 만들어지는 거였다니!





‘아침이슬’ 반주를 알게 된 해에 주요3화음만 들어가는 노래를 만들었다. 문예반에서 썼던 시에 가락을 붙이며 언니가 해준 방법대로 나도 직접 건반을 치며 반복해서 불러본 것이다. 통속적인 가사에 무난한 멜로디지만 구성은 나름 실험적이다. 3/4박자의 느린 템포로 절을 부르고 후렴부터 4/4 박자의 신나는 빠른 템포로 바뀌는 데다(다비치 ‘8282’의 그 구성!) 맨 마지막 마디에서 한 키를 낮추는 파격 전조로 마무리. 그냥 떠오르는 멜로디 흐름을 따라가다보니 그렇게 됐다. 뭘 몰라서 용감했달까. 당시 나는 이 곡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들려주며 어떠냐고 묻기도 했다. 역시 용감했네….



까아만 밤에 달님 인사하고
달님 색깔 은빛 물감과
환한 낮에 햇님 인사하고
햇님 색깔 주홍빛 물감으로

은빛 물감 풀어 은비 내리고
주홍빛 물감 풀어 빛을 내리면
아름다운 이 세상 더 곱게 해줄텐데






박자와 전조를 제멋대로 했…






나는 자주 풍금을 쳐보고 싶었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조용할 때 풍금을 치면 너무 주목받으니까 굳이 먼저 풍금 뚜껑을 열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 뚜껑을 열면 다른 아이들이 몰려와 너도 나도 쳐보려고 해서 끼어들기도 어려웠다.



사실 그때는 음악말고도 관심거리가 많았다. 작가가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나는 초등학교때 모든 특별활동에서 문예반을 선택했었다. 내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백일장에서 상을 한 번 타볼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음악에 대한 관심이 차차 사라져 갈 즈음 언니에게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우리 돈 모아서 피아노 사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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