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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Oct 24. 2021

언니와 피아노

음악 놀이 아이템을 획득했다


우리집에 피아노가 있다면?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때까지 피아노는 부잣집 아이들이나 가질 수 있는 것, 혹은 콩쿨에서 입상하거나 피아노 선생님이 부모님 앞에서 입이 침이 마르도록 나를 칭찬해줘야 겨우 포상으로 주어지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언니는 성악을 배우고 싶어서 길을 찾던 중이었다. 언니 입장에서는 음악 공부를 위해 뭐라도 해보려면 일단 집에 피아노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집은 피아노를 사줄 만큼 넉넉하지 못했고, 부모님이 순순히 큰 돈을 써주실 리도 없었다. 그래서 언니는 중고 피아노 시세를 알아보면서 오랫동안 혼자 용돈을 모았다고 했다.



이쯤에서 언니 얘기를 해야겠다. 세 딸 중 둘째인 작은언니(‘아니 뭐냐 이게 뭐냐’에 실로폰 쳐주던 그 언니)는 거의 모든 면에서 나와 정 반대의 성격이다.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었던 언니는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이 성악 전공이라는 걸 알고 틈날 때마다 개인 레슨을 해달라고 부탁드렸다고 한다. 집에서 레슨비를 지원해주기 어렵지만 음악을 정말 배우고 싶다며 진정성을 내보였다고. 언니의 진심을 본 선생님은 틈틈히 발성과 호흡을 알려주셨고, 언니는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연습을 계속했다. 고등학생때는 교회 성가대 지휘자분께 간곡히 요청하여 레슨을 받았다. 지휘자가 바뀔 때마다 언니의 지도 선생도 바뀐 셈인데 어떤 분은 언니가 잘 따라오지 못하면 때리면서 가르쳤다고 한다. 그럼에도 언니는 울음을 참아가며 독하게 버텨냈지만, 정작 집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부모님이 언니의 음대 진학을 결사반대 하셨기 때문. ‘넌 재능이 없다’부터 시작해서 ‘음대 등록금이 얼마나 비싼지 아냐’ ‘성악 전공해서 뭐 먹고 사냐’까지 유구한 전통의 잔소리가 난폭하게 들려왔고, 언니는 결국 인문계열로 수능을 치렀다.



하지만 언니의 꿈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언니는 다시 굳세게 마음 먹고 재수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입시 레슨을 받고 집에서도 연습을 계속했다. 언니와 같은 방을 쓰던 나는 아침마다 언니가 목 푸는 소리에 잠을 깨고 밤이면 언니의 복식호흡 숨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노력 끝에 언니는 다음 해 성악 입시에 성공했고, 혼신의 힘으로 공부하여 전 학기 장학금을 받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 와중에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교 다닐 생활비를 벌었다. 언니의 음대 진학을 그토록 반대했던 부모님은 곧 언니의 열성팬이 되셨고, 누구보다 언니를 지지하시며 지금도 언니가 녹음한 노래를 틈날 때마다 들으신다고 한다. (20년 세월을 한 문단으로 줄인 것입니다)



매사에 주도면밀한 언니는 중학생 시절에 이미 큰 그림을 그렸다. 혼자 힘으로 피아노를 사기는 어려우니 나를 구슬린 것이다. 처음에는 뜬금없다고 생각했으나 언니는 내가 혼자 풍금을 치게 된 걸 알고 있었고 그 부분을 집중 공략하니 점점 마음이 기울었다. 언니는 '피아노가 있으면 언제나 마음대로 칠 수 있다', '음악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계속 배우기 때문에 피아노로 음악 이론을 공부할 수 있다', '언니가 이미 돈을 모아놨으니 넌 일부만 보태면 된다'고 조곤조곤 설명했다. 본론은 이거다. 곧 있을 설날에 세뱃돈을 받으면 고스란히 모아서 내게 달라는 말.



언니의 말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이번 세뱃돈만 보태면 나도 피아노를 가질 수 있잖아? 우리는 금방 합의했고 언니는 약속한 대로 피아노를 샀다. 내가 한 일은 정말 세뱃돈 보탠 것 밖에 없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우리 방에 검은색 업라이트 피아노가 떡 하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언니가 알아서 괜찮은 물건을 알아보고 조율까지 맡긴 덕분이다.



그 피아노는 언니뿐 아니라 나의 역사에도 관여했다. 언니는 음악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피아노가 필요했지만 내 입장에선 어느날 피아노라는 놀잇감이 일상에 뚝 떨어진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피아노가 생겨서 인생이 바뀐 사람은 나였다.  





(이미지 출처 Photo by Johannes Plenio on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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