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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Oct 24. 2021

코드 반주 수련기

주의: 또 야매임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교회에서 친구가 피아노를 치는 걸 가만히 보다 물었다.


“오른손은 멜로디인데 왼손은 뭘 보고 치는 거야?”



친구가 연주하던 복음성가 악보집에는 멜로디만 나와 있었다. 주요 3화음도 아닌 것 같고, 세련된 소리도 들리는데 왼손이 쳐야 하는 낮은음자리표 달린 악보가 없잖아. 뭘 보고 반주를 하지? 나는 악보 위에 조그맣게 달린 알파벳의 정체가 특히 궁금했다. 친구가 큰 마음먹듯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자, 이것 봐. (알파벳을 가리키며) 이게 코드야. C가 있으면 ‘도미솔’을 치면 돼. 알파벳이 올라가면 손도 한 칸씩 올라가는 거야. D는 ‘레파라’ E는 ‘미솔시’ F는 ‘파라도’ G는 ‘솔시레’ A는 ‘라도미’ B는 ‘시레파’ 이렇게 외워 봐.”



친구는 시범을 보여주며 따라 해보라고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건 반만 맞는 설명이었다.) 그 후 나는 한 곡을 정해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왼손으로 아르페지오를 엉성하게 반복했는데 피아노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으니 기본기가 부족해 손가락 관절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될 때까지 반복하다 보니 음악이 되긴 됐다. 처음으로 코드 반주를 해냈지만 뿌듯함은 잠시였고, 내가 들어온 음악과 내가 연주하는 음악이 너무 달라서 이내 답답해졌다. 나는 이렇게 단순하고 촌스럽게 치는데 저들은 뭔가 다른 걸 치나? 어디서 따로 배우는 걸까? 의아해하던 중에 비밀을 발견했다.



반주자였던 친구가 피아노 악보집을 보고 연주할 때였다. 오른손이 치는 높은음자리표와 왼손이 치는 낮은음자리표, 그리고 계이름과 코드까지 다 있는 연주 악보였는데 이미 음반에 나온 대로 편곡된 구성이라 내 귀에는 무척 세련되게 들렸다. 나는 초견은 불가능했지만 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이론 덕분에 악보에 어떤 음이 나오는지 대충 읽을 수는 있었다.



음…. 방금 오른손이 ‘도미솔’을 한 박씩 네 번 쳤군. 어? 근데 왼손이 ‘라’를 치네? 다 합치면 ‘라도미솔’인데 이건 뭐지? 그냥 ‘라도미’보다 뭔가 멋있게 들려!


요런 느낌



악보를 자세히 봤더니 그 부분 상단에 Am7이라고 적혀 있었다. ‘라도미솔’의 주인공은 Am7였다.



m은 뭐지? 7은 뭐지? 혹시 ‘솔’이 들어간 것 때문일까? 가만있자… (손가락을 세며) 라, 시, 도, 레, 미, 파, 솔… 어? ‘솔’은 ‘라’의 일곱 번째 음이구나!



헝클어진 병렬 전선을 제대로 연결한 것처럼 머릿속 전구에 불이 켜졌다. 작은 맥락을 발견하자 아드레날린이 솟는 것 같았다. 나는 집에 가자마자 언니가 틈틈이 모아 온 악보집들을 펼쳐 살펴보았다. 거기에도 m7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그랬구나!



그 후 나는 매일 하교 후 집에서 피아노를 쳤다. 악보집 부록에 나온 코드 설명을 보면서 많은 의문이 해결됐다. ‘m’은 minor화음을, ‘M’은 major 화음을 의미한다는 것도 알았다. 알파벳 옆에 작게 붙은 숫자는 근음과의 거리를 나타낸다는 것, 특별한 느낌을 주는 ‘aug’나 ‘dim’의 의미도 어렴풋이 알게 됐다. G/B처럼 슬러시(/)가 붙는 분수형 코드는 베이스와 그 위에 쌓는 화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건반을 치며 소리를 확인하니 어떤 느낌인지 이해가 됐다.



음악은 수학을 닮았더니 정말 그랬다. 정확히 계산해야 원하는 코드를 연주할 수 있고, 그것이 손에 익어야 어떤 상황에서든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고작 반음 차이로도 소리와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니 집중이 필요했다. 나는 차근차근 건반 칸 수를 세어가며 코드를 익혔다.



나는 보통 사람들보다 집중 가능 시간이 짧은 편인데 새로운 무언가에 꽂히면 순간적으로 앞뒤 안 가리고 몰입하기도 한다. 몰입을 지속하는 시간이 짧은 게 문제일 뿐. 당시 우리 집에는 천여 곡의 코드 악보가 담긴 교회용 복음성가집이 있었다. 나는 하교 후 집에 돌아오면 피아노 앞에 앉아 첫 곡부터 맨 마지막 곡까지 쳤다. 어차피 학원도 다니지 않았고 서너 시쯤 집에 가면 저녁까지 집에 나 혼자밖에 없었다. 당시 살던 집은 아파트가 아니라 일반 주택 1층이어서 크게 눈치 보이진 않았다. 누군가가 이렇게 하라고 지시했다면 거부감을 느꼈겠지만, 당시에는 순전히 재미로 피아노를 쳤다.



새로 알게 된 화음들을 익히며 되는 대로 연주를 계속하다 보니 코드의 진행이 대체로 거기서 거기라는 걸 알았다.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방식도 몇 가지로 추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수의 음반에서 듣던 세련된 진행이 들릴 때 전율하기도 했다. 매일 비밀 상자를 여는 기분이랄까.



당시 내 연주는 '딩동댕동'보다는 '우르릉 쾅쾅'에 가까웠다(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피아노를 칠 때의 바른 자세나 페달 사용법 같은 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 무엇을 쳐도 서툴고 거칠었던 그때를 생각해 보면 타잔이 떠오른다. 야생동물처럼 살다가 처음 문명사회에서 식사를 하게 된 타잔의 머릿속에는 예의나 절차 같은 건 입력된 바가 없었을 것이다. 오직 [음식이다 -> 먹는다]에 따라 움직였겠지. 나도 대충 이런 반응이었던 것 같다.


[피아노다 -> 친다]

[막 치니까 이상하게 들린다 -> 방법을 바꿔서 친다]



그렇게 건반을 두들기다 보면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만연히 즐겁기 만한 중학생이 있을까. 예민한 시기에 학교나 또래 관계에서 종일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은 것들, 가족 때문에 속상했던 마음, 나를 단단히 사로잡은 미움, 끝도 없는 비교 의식 같은 감정을 어딘가에는 배출해야 했다. 나는 서스테인 페달을 온 힘으로 꽉 밟으면서 흡사 천둥소리처럼 저음역을 꽝꽝 내리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때로는 울기도 하면서.



피아노를 취미로 친다고 하기엔 삶에 너무 깊이 들어와 버렸다. 선생님께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독학이라 하기도 애매했던 이유는, 음악을  잡고 공부했다기보다는 그저 추측과 확인을 반복하는 '놀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외로운 중학생에게 몰입도 높은 놀잇감이었고 마음을 공유하는 친구였으며  넓고 멋진 소리의 세계 여는 문이 되어주었다.






<피아노의 숲> 주인공 카이를 좋아했다. 어떤 면에서는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커버 이미지 출처 Photo by Sven Brandsma on Unspla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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