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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Apr 19. 2024

엄마처럼 살지 마

너와 나는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기



단 한 번도 옷을 더럽힌 적 없는 아이가 존재할까?


어린 인간에게 성장은 운명이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는 필연적으로 넘어지며 성장한다. 뛸 수 있게 되면 다칠 가능성도 높아진다.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옷에 음식물을 묻히지 않는 법을 배우려면 잔뜩 흘려봐야 한다. 이유식을 먹으며 전신에 영양팩을 하던 아기도 자라 가며 점점 덜 묻히다가 어른이 되는 것처럼. 그러니 아이가 음식을 먹을 때 옷에 흘리는 건 세상의 이치에 가깝다. 그래,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이가 옷을 더럽힐 때마다 왜 이렇게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쓰는 글이다.



조심해야지. 고개를 더 앞으로 내밀어서 먹는 거야. 젓가락을 입 앞에 두고 가만히 있으면 어떡해. 또 떨어지잖아. 잔소리를 하다 하다 좀 참아보려고 입을 막아도 푹푹 한숨에 실망스러운 표정도 감춰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이에게 이럴 순 없다고 각성을 거듭한 끝에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종의 의식화인데 아이가 뭘 흘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괜찮아. 빨래하면 돼.”


라고 말하며 별 것 아닌 일로 여기는 것이다. 확실히 심신안정에 도움이 됐다. 그런데 얼룩 메이커 당사자가 직접 그 말을 뱉기 시작할 줄은 몰랐다. 국물을 툭 흘리고는 태연하게,

“괜찮아요. 빨래하면 되니까요.”
 하고 씩 웃는데 와,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지. 근데 빨래는 네가 할 거야?”
 …참아야 하는데. 실패했다.



이번에는 효과가 좋다는 얼룩제거제를 샀다.

‘그동안 내가 화가 났던 건 빨래가 귀찮아서였을지 몰라. 얼룩 제거 과정이 쉬워지면 괜찮을 거야.’

일종의 분노 방지 장치랄까. 내친김에 장치를 하나 더 설치했다.
“앞으로 네가 뭘 흘려서 엄마가 또 화를 내면 네가 ‘얼룩제거제 샀잖아요’라고 말해줘. 엄마가 화내지 않도록 생각을 일깨워주는 거야. 알겠지?”

아이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후 밥을 먹다 아이가 또 옷에 흘리자 다급히 돌아보며 말했다.
 “엄마, 얼룩제거제 샀잖아요.”
 “아, 그렇지. 알았어. 괜찮아.”


얼룩제거제를 생각하자 욱했던 게 좀 가라앉았다. 하지만 위기는 금방 찾아왔다. 새로 산 옷을 처음 입는 날, 아이가 카페에서 음료를 먹다 옷에 잔뜩 흘린 것이다. 내 눈이 이글이글 불타는 것을 본 아이가 다급히 외쳤다.
“엄마! 얼룩제거제 샀잖아요!”


“그랬지. 근데 오늘 처음 입은 새 옷인데 너 진짜 너무한다.”
…망했다. 또 원점이다. 아이는 풀이 죽고,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수업하려고 학생들 앞에 섰는데 문득 그들의 옷이 눈에 들어왔다.

“너희들도 뭐 먹다가 자주 흘리니?”
 

내 질문에 아이들이 저마다 소리쳤다.


“저 오늘 세 군데 흘렸어요!”

“저 맨날 흘려요!”
“제가 제일 아끼는 옷인데 오늘 대박 흘렸어요. 어휴....”


고학년도 이런다고? 깜짝 놀랐다.


“그러면 집에서 부모님이 흘렸다고 혼내진 않으셔?”


그러자 아이들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고작 그걸로 혼낸다고?’라는 표정이었다. 아, 역시 내 문제였구나. 조심하지 않은 아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날 저녁, 식사하며 운을 뗐다. 학교 아이들도 허구헌날 옷에 뭘 흘린대. 놀다 보면 옷이 더러워지기도 하잖아. 그건 지극히 일상적이니까 혼날 일이 아닌 것 같아.
육아 8년 차임에도 아직 손빨래를 내 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어린이는 옷을 더럽힐 운명이고, 보호자는 그걸 세탁할 운명이라는 걸 수용하면 조금 더 너그럽게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남들은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이게 어렵지?



실수와 잘못을 구분해야 한다는 걸 안다. 아이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흰 옷소매를 짬뽕에 담근 것도 아닌데, 어린아이의 작은 실수에 왜 머릿속 버튼이 눌리는 걸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네가 진짜로 걱정하는 게 뭐야? 어떻게 해야 조심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조심하라고 백 번을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응? 뭐가 두려워서 아이를 채근하는 거야?


실망과 분노, 죄책감을 걷어내자 마음속 깊이깊이 뿌리내린 두려움이 드러났다.





얘가 나처럼 될까 봐 무서워.

조심하는 습관을 들이면 나처럼 안 될 수도 있잖아.







이쯤에서 솔직히 말하겠다. 나 역시 음식물을 자주 흘린다. 앞서 아이들은 흘리면서 어른이 된다고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옷 여기저기 묻히고 다니는 사람이 여기 있다. 특히 떡볶이, 쫄면, 주꾸미볶음, 짬뽕 등 쫀득한 된소리 네임드를 만나면 꼼짝없이 당한다. 하필 흰 옷을 유독 좋아하기까지 하니 외식하고 집에 돌아오면 이를 갈며 손빨래를 하기 부지기수. 정말 지긋지긋하다.


아이를 보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칠칠맞다고 비난하는 눈빛, 비아냥거리는 말투, 손가락질, 고성. 이 모든 게 내 성장의 재료였다. 그래서 내 아이만큼은 나처럼 구겨진 채 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이의 작은 실수에 더 민감해졌다. 차라리 무심한 게 나을 텐데. 결국 아이는 어릴 적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게 됐다. 상처는 대를 잇는다더니. 무한의 계단을 도는 것처럼 두려움, 실망, 분노가 반복되는 형국이 낯설지 않다.





‘무엇을 믿느냐’는 곧 ‘무엇에 관한 증거를 모으는가’와 연결된다.

제주에 사는 나는 제멋대로 운전하는 차들을 보면 즉시 번호판을 확인한다. 하, 허, 호. 역시 렌트카들이 문제야. 그리고 마음속 신념 상자에 증거를 추가한다. 그 상자 위엔 [렌트카는 도로의 말썽꾼]이라고 적혀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문제 상황의 절반 정도는 렌트카가 아니었지만 그런 사례는 세지 않는다. 내 신념 상자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증거를 모으는 셈이다. 편견은 그렇게 내 안에서 몸집을 불린다.



아이에게서 내 모습이 보일 때마다 내 신념은 더 견고해졌다. 특히 아이가 부주의하거나 멍 때리거나 할 일을 미루면 ‘역시 나를 닮았나 봐’ 생각하며 증거를 모았다. 만 7세 어린이의 평균적인 주의력이나 조절능력은 이 신념 상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아이는 나를 닮았으니까. 두려움은 너무 달콤하게 본능을 자극해서 삼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덕분에 잘못된 신념이 몸을 키웠다.



따라서 아이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으려면 매번 굳게 결심해야 한다. 이 아이는 나와 다르다. 이 아이의 삶도 나와 다를 것이다. 바위에 글자를 새기는 마음으로 되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또 재빨리 두려움의 그늘 아래 쪼르르 달려가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달달 떨면서 “얘가 나처럼 되면 어쩌지 어쩌지...”하고 중얼거릴 것이다. 아, 정말이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제 낡은 신념을 버리고 새 상자를 만들어야 할 시간. 아이가 또 옷에 무언가를 흘리고선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엄마도 자주 흘려서 네 마음을 알아.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얼룩제거제로 엄마가 잘 빨아볼게.

사실 뭘 흘리는 건 잘못이 아닌데 엄마 마음속에서 쓸데없는 걱정이 생겨서 그랬던 것 같아. 그래서 이 걱정을 물리치도록 네가 도와주면 좋겠어.

앞으로 이런 상황이 생기면 ‘엄마, 나 잘 클 거예요‘라고 말해줄래?“


아이가 입을 헤 벌리며 웃더니 따라 말했다.



엄마, 나 잘 클 거예요!





아이의 말에는 정말 힘이 있는지 그 순간 내 오래된 두려움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너는 잘 클 거야. 믿음의 상자가 생겼다.


세탁을 마치고 건조기에서 꺼낸 옷은 깨끗했다.
















지금은 여간한 얼룩에는 눈도 깜짝 하지 않는다.

이렇게 또 산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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