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도 성장할 수 있다
글이 많이 쌓였다.
스크롤을 내리며 하나하나 살펴보니 전부 쓰다만 글이었다.
새로운 글을 시작할 때는 즐겁지만 긴 글을 끝까지 이어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마감을 미루고 미루다 더는 못 버틸 때 최대 가속을 내며 완성하는데, 이것도 그나마 협업하는 출판사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부끄럽지만 개인의 의지로 장편을 완성해 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구상은 늘 하기 때문에 뭐라도 끼적이다 보면 장편 원고의 첫 번째 꼭지글까지 쓸 수 있다. 그렇게 첫 번째 글만 나날이 쌓여간다.
한 권의 멋진 이야기를 쓰고 출간한 작가들이 대단해 보인다. 존경스럽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파고든다.
불가능에 집중하자면 그렇다. 나는 장편을 못 쓰는 인간이라고 판단하면 딱 거기까지인 인간이 되고 만다. 근성, 지구력, 성실함… 내게 없는 것의 목록을 혼자 열심히 만들고는 ‘이게 무슨 작가라고. 창피하다’거나 ‘이렇게 살 거면 왜 살지?’ 따위의 생각들과 십년지기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자기계발서 애독자인 남편 덕분에 나도 그간 거들떠보지 않던 자기계발서를 몇 권 훑어보았다. 각자의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아낸 이야기가 고양감을 주었는지 문득 전에 해본 적 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난 못하는 게 많긴 해.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지? 그렇게 ‘가능’을 향해 생각을 틀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장편을 완성할 수 없어.
이 생각을 약간만 바꿨더니,
-나는 단편을 쓰는 게 더 쉬워.
한 끝 차이로 나는 가능성 있는 인간이 되었다. 작업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마저 써야 하는데, 하는데…’ 반복하며 스스로를 원망하지 않게 되었다. 흐름이 끊어져도 부담 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나의 불가능과 가능성은 마치 책의 앞표지, 뒤표지 같아서 동일한 구성요소라도 펼치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금까지 나의 어떤 면을 조명해 왔을까? 늘 해오던 생각에서 벗어나 바깥을 비추면 새로운 사실이 보인다.
-나는 한 가지에 집중하기 어려워.
이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말로 바꿔보았다.
-나는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어.
실제로 지금 이 에세이 하나, 동화 시리즈 하나를 비롯해 세 가지 원고를 쓰고 있다. 하나를 꾸준히 할 수 없어서 여러 개를 돌아가며 쓴다. 덕분에 매번 새로운 마음가짐이 든다.
대학 졸업 후 내내 프리랜서로 살다가 처음 회사에 다니게 되었을 때,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나는 루틴과 반복을 싫어할 뿐 아니라 그 삶에서 불행과 우울을 느낀다. 그러니 20년, 30년 근속하시는 분들은 존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떻게 저런 삶이 가능하지?
‘나는 한 군데에 소속될 수 없는 인간인가 봐.’
정말 그랬다. 그래서 지금은 세 학교에 소속된 강사로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한다. 때마다 도서관 같은 공공기관들의 부름을 받아 단기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소속감? 그까짓 거 기꺼이 쪼개어 여기저기에 나눠줄 수 있다. 내가 일하는 모든 곳에 애정을 갖는 지금의 삶이 퍽 만족스럽다.
미루고 주저앉아 있을 때 누군가의 한 마디가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거 다 하셨어요?”
“이제 슬슬 해야 하지 않아?”
“지금 당장 해!”
이런 말을 들어야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어쩌면 그 말을 기다리는 것일 수 있다. 기질 상 위기에 놓여야 몸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위기 상황을 만드는 것 같다.
밤에 글을 쓰려고 앉았지만 계획 같은 건 뭉개고 앉아 유튜브 영상만 봤던 날이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 조금이라도 써야 하는데 도무지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고 눈앞의 자극에 몰입하고 싶었다. 이럴 때는 정신으로 씨름을 하는 느낌이다. 본성과 의무의 싸움이랄까.
‘이럴 때 누가 옆에서 당장 글부터 쓰라고 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을 내가 해도 효과가 있을까?’
그래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너 지금 이러면 안 돼. 오늘 구상한 건 조금이라도 쓰고 자야지.”
그러자 놀랍게도 의지가 한 줌 더 생겼다. 그 덕에 겨우 겨우 원고를 썼지만 그 작은 승리가 큰 힘이 되었다.
(이곳에 연재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언제 글을 올리겠다고 약속을 하면 그것을 고삐 삼아 달릴 수 있으니까!)
특정한 영역에서 자꾸 실수를 한다면 그 상황 자체를 바꾸는 것도 도움이 된다.
뚜껑을 돌려 여닫는 텀블러를 쓰다 보니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아 가방이 흠뻑 젖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두 번이 아니라 셀 수 없을 만큼 쏟았다. 그때마다 자신을 갉아먹는 생각들에 휩싸이곤 했다.
'또 정신 못 차렸구먼.'
'난 언제까지 이 모양일까?'
'미쳤나 봐, 진짜!!!'
그러다 가방 속 아이패드까지 젖었을 때는 아주 나쁜 생각까지 도달했다. 나 자신에게 물리적으로 분풀이를 하고 싶은 그런 마음 말이다.
내면의 밑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 위로 가고 싶어, 정상인이 되고 싶어. 가만, 정상이라는 게 뭐지?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치면서 정신이 들었다. 그러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텀블러를 원터치로 바꾸면 되잖아?
상황을 바꾸면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닌 것이 된다. 당장 남편에게 전화해 이 얘기를 했더니 무척 흡족해하며 빨리 텀블러를 바꾸라고 했다. 신이 나서 쇼핑앱에서 텀블러를 검색했다. 3만 원만 쓰면 내 문제는 사라지는 거네?
하지만 내게는 '아직 쓸 만하다면 새것을 사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다. 현재 사용하는 이 뚜껑 텀블러는 나와 좀 안 맞긴 하지만 보온·보냉 효과가 확실하고 디자인도 예쁘다. 일회용 컵보다 더 나쁜 건 멀쩡한 텀블러를 쓰다 버리는 것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나만 조심하면 돈도 아끼고 환경도 보호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전과는 다른 의욕이 솟았다. 놀랍게도, 그 후 단 한 번도 물을 쏟지 않았다. 뇌신경에 길을 하나 더 만들었는지 의식적으로 뚜껑을 꽉 닫고 한 번 더 확인하게 되었다. 만약 누가 이렇게 하라고 잔소리를 했다면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내면 깊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의지만이 나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나의 불가능이 객관적인 사실인지, 혹은 편견에 불과한 것인지 의심해 볼 필요도 있다.
앞서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할 수 없다고 했지만 넓게 보면 나는 7년째 강사 일을 하고 있으니 꽤나 꾸준한 편이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 우울을 느낀다고 했지만 나는 매일 가족들을 먹일 음식을 준비한다. 남편이 맡은 설거지는 바쁘면 사흘도 미룰 수 있지만 내가 맡은 ‘밥’은 미루기 어렵다. 내가 밥을 차리지 않으면 사 먹든 굶든 대충 때워야 한다는 것인데 어느 쪽도 비용이 든다. 그러다 보니 의무감에 고정되어 뭘 먹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겹기 짝이 없었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니까 우울해.’
매일 밥을 차리는 게 늘 기쁠 수는 없지만 ‘밥 차리는 건 우울해’와 ‘밥 차리는 게 우울할 때도 있어’는 다르다. 비관하고 불평하며 음식을 만들던 날 이것이 나와 가족 모두에게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혹시 내가 고정관념에 매몰된 건 아닐지 의심해 보았다. 밥 차리는 건 우울한 일이라고 믿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단순히 이렇게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이 됐다. 그러자 놀랍게도 요리가 더 즐거워졌고, 가족들이 잘 먹을 때 행복을 느꼈다. 이 감정을 핵심 기억에 저장하려고 자주 떠올렸다. 이전의 부정적인 감정과 중화되었는지 이제는 별생각 없이도 요리를 계속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남편과 비교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내가 요리를 할 때 그는 보통 청소를 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는데, 몇 번 역할을 바꿔보니 차라리 요리가 낫더라.)
남들은 직선을 이어가고 있는데 나는 매번 조금 이어가다 끊어지고 또 새로운 선을 긋다 끊어지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이런 스스로를 ‘지속불가’로 낙인찍고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없는 자신을 원망해 왔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지속성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었다. 지속한다는 건 조금도 끊지 않고 실선으로 쭉 이어간다는 뜻이 아니었다. 사실은 모두가 파선과 쇄선을 그리며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을, 중간에 몇 번씩 좀 끊겨도 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선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르다. 내 선은 너무 자주 끊어지니까 내 인생은 점선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주 실패한다는 건 달리 보면 자주 새로 시작하는 것. 그럼에도 건강한 삶, 행복과 소망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으니 나의 비뚤비뚤한 점선도 먼 데서 조망하면 직선처럼 보일 것이다.
나의 점선을 받아들이자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지속할 시간이구나 싶으면 청소도 하고, 이불 빨래도 하고, 책을 읽고, 글도 쓴다. 그러다 무기력을 느끼면 더 애쓰지 않고 내버려 둔다. 잠을 자든, 아이돌 영상을 보든, 엉망이 된 집 한가운데서 드러누워서 멈춘 시간을 받아들인다. 예전에는 무기력하게 시간을 허비하다 안 씻고 잠들기까지 하면 ‘역시 난 안 되나 봐’ 생각하며 스스로를 비난해 왔다.
선이 잠시 끊어진 시간이 내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후로는 나를 향해 치켜든 손가락을 내렸다. 생산성 있게 살아보려 지켜온 것들이 한 번씩 와르르 무너질 때 비로소 다시 쌓을 힘, 지켜갈 의지가 생긴다. 무기력도 성장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기이하게 여길 이 삶이 나의 방식이고 질서다.
“사흘쯤 엉망으로 뒹굴어야 나흘째엔 생산성 있게 살 수 있어.”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는데 지금은 바뀌었다.
“사흘 바람직하게 살았다면 하루쯤은 무너져도 돼.”
새삼 놀랍다. ADHD 인간은 이렇게 성장한다.
(이 글을 쓰다가 중단하고 열흘 뒤에야 완성했다. 사흘 바람직하게 살다가 열흘을 허비했다. 그럼에도 점선은 이어진다.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