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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Jun 14. 2024

나를 못 믿어서 생기는 일들

자기확신의 시대에서 자기불신 하기






모처럼 바다에 나간 날이었다.


아빠와 재미나게 물놀이를 하고 온 아이가 이번에는 엄마와 같이 들어가고 싶다고 한다. 아이의 손을 잡고 물에 들어가니 파도가 어찌나 거친지 몸을 지탱하기도 어려웠다.

안 되겠다. 다시 나가자.

뒤돌아 나오려는데 뒤에서 큰 물이 우리를 확 덮쳤다. 아이가 물에 빠져 내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다. 그 순간 내 심장도 바닥에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다행히 우리는 손을 꽉 잡고 있었고 나까지 휩쓸릴 만큼 큰 파도는 아니어서 곧바로 아이를 일으켜 안아주었다. 놀란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이 달려와 아이를 받아들고 달래주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다시 잘 노는 아이를 보면서 조금 전 일이 자꾸 떠올랐다. 아빠와는 아무 문제 없이 놀았는데 왜 나는 그럴 수 없었을까? 내가 더 힘이 세고 몸을 잘 쓸 수 있었다면 아이가 물에 빠질 일도 없지 않았을까?


다음 날 아이가 말했다.

“다음부터 바다에 가면 전 아빠랑 노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아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도 나를 못 믿는구나.’



이 느낌을 이미 안다. 전에 수업에 쓸 종이를 칼로 재단하고 있는데, 초등 3학년 학생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렇게 말했었다.


“선생님이 칼질하는 거 보니까 제가 다 불안해요.”






나를 믿을 수가 없다. 하나에 집중하지 못해 늘 산만하고, 손을 쓰는 일에 꼼꼼하지 못해 서툴다. 샤워하다 뭔가 따끔해서 보면 작은 상처가 나 있다. 옷을 갈아입다가 원인 모를 멍을 발견하기도 한다. 인지 바깥에서 계속 부딪히고 다치는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손은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자꾸 뭔가를 떨어뜨린다. 냉장고에 반찬통을 집어넣다가 와장창, 선반에서 그릇을 꺼내다가 우당탕탕. 얼마 전에는 냉장고에서 달걀 두 개를 한 손에 하나씩 집어들었는데 아무 이유 없이 두 개를 모두 떨어뜨렸다. (보다못한 남편이 뭔가를 검색하더니 뇌 검사를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한 달 사이 겪은 일만 늘어놓자면, 바닥에 놓인 택배 상자 모서리에 다리를 베이고, 양손에 짐을 잔뜩 들고 집에 들어오다가 장난감 수납 상자 뚜껑을 밟는 바람에 벌러덩 자빠졌다. 침대 옆을 지나쳐 가다가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혀 멍이 들었는데 이틀 뒤 또 같은 모서리에 똑같은 부위를 세게 부딪혀 원 플러스 원, 피멍이 들었다. 싱크대에서 물을 틀고 도마를 슥슥 닦다가 싱크볼 그릇 더미 사이 빼꼼 튀어나온 식도 끝에 손가락을 베었다.



나는 자주 시간을 잊고 기한을 넘겼다. 덤벙대다 일을 그르쳤다. 스마트폰을 변기에 빠뜨린 게 두 번. 침대 위에 쟁반을 두고 라면을 먹으려다 그릇째로 매트리스에 엎어버렸고, 노트북을 보며 우유를 마시다 키보드에 엎질러 새 노트북을 사야 했다. 신분증도 서너 번, 신용카드는 더 자주 재발급 받았다. 서류에 정보를 잘못 기입하여 지적을 받고, 제대로 고쳐놓으면 또 다른 실수가 발견된다. 물통 뚜껑을 잘못 닫아 가방이 다 젖어버린 일도 다반사.



성인이 되어서도 이 정도라면 청소년기, 아동기에는 어땠겠는가. 대체 왜 그랬냐는 질책과 '또 시작이네'라는 비아냥,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벌컥 화를 내는 목소리, 목소리들. 아직도 내 측두엽 어디쯤에 남아있는지 아직도 실수를 할 때마다 자동 재생되어 들려온다.


덕분에 나는 아주 단단한 자기 불신을 얻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를 믿을 수 없다. 육아 멘토들이 입 아프게 강조하는 ‘자존감’ ‘자기 확신’ ‘성취 경험’과 정 반대로 살아온 셈이다.







또 남편의 신용카드가 없어졌다. 마지막 이용내역을 보니 나 혼자 다녀온 카페였다. 남편은 내가 또 깜빡했을 거라 의심했고, 나는 온갖 주머니를 뒤져보며 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며칠 후 남편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날 여보에게 카드를 돌려받은 게 기억났어. 그리고 내가 그걸 작업실 책상에 두고 온 것 같아.”


놀랍게도 카드는 정말 거기 있었다. 그는 나를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사실 나도 놀랐다. 내가 카드를 잃어버렸을 거라 의심없이 믿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확신적인 자기불신이라니.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며 생각한다.

‘저 사람은 자기가 실수하지 않을 거라 당연히 믿고 있겠지?’

나도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들이 있었는데, 내 열 손가락 중 단 한 개도 믿을 수 없어서 지나치게 불안해 하다가 기필코 실수를 했었다.


운전면허 취득을 미루고 미룬 까닭도 자기불신 때문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1차선 도로에서 덤프트럭이 마주 올 때 내 몸이 실수를 할 것만 같았다.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그 순간 무심코 헛짓거리를 하다 핸들을 5도만 잘못 꺾어도 큰 위험이 닥치니까. 한 순간의 작은 선택에 내 안위가 달렸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두려움을 이길 용기가 채워지고서야 면허를 땄다. 지금은 매일 운전하며 살지만 문득 생각한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으악!')


자기확신이 가득한 사람들이 부럽다. 예상한 대로 사지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 나도 모르게 딴 생각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 예측 가능한 범주를 계산하고 행동하는 사람. 운동선수, 악기연주자, 화가, 헤어 디자이너… 실수 없는 찰나의 순간이 이어져 완벽한 결과물을 만드는 이런 분들이 부럽고 대단해 보인다. 나는 정교한 작업을 할 때마다 생각한다.

‘지금까진 괜찮았지만 앞으로 실수할지도 몰라.’

순간을 분절하며 다음 또 다음을 의심하는 나는 결과물을 오래 묵히고 숙고할 수 있는 업이 어울리는 것 같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일지도.






언제든 틀릴 수 있는 사람, 언제 실수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이 40년이 되어간다. 뒤돌아보니 긴 세월 단단한 자기불신을 다져온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실은 좋은 점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뜻밖의 레슨을 받을 수 있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이제 배울 것을 찾게 되고 몰랐던 사실을 수용할 수 있으니까.


대화중에 상대방이 내 말이 틀렸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몰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더 시간이 지나면 자기 말이 맞았음을 알게 될 거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왠지 무시 당하는 기분이 들어 화도 났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실제로도 잘 모르니까. 나의 확신적 자기불신은 나와 정반대의 의견을 수용하게 하고 시야를 넓혀주었다.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차면 틈이 좁아질 수 있다. 내가 맞으니까, 내 생각이 옳기 때문에 다른 의견을 잘 듣지 않는 일도 생긴다. 반면 자기불신은 마음 속에 틈을 만들어 새로운 의견과 사실을 받아들일 자리가 생긴다. 그러면 고집을 덜 부리고 타인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유연하게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을 과신하는 것보다 불신하는 것이 자기객관화에 도움이 된다.


나를 믿지 못해서 엄중한 잣대를 놓고 스스로를 본다. 나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내가 잘하는 일과 어려워 하는 일을 구별하게 되면서 신기하게도 조금 더 규모있게 살게 된 것 같다. 잘하는 일을 자주 하고 어려운 일에는 도전하는 삶. 요즘은 중독에 대한 책을 읽고 아무래도 내가 스마트폰에 중독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스마트폰 멀리하기' 캠페인을 벌이는 중이다. 언제든 현생을 잊고 딴길로 갈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스스로를 '요주의 인물'로 두고 살핀다. 집이 엉망이 되어가고, 씻지 않고 잠드는 일이 많아지면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흘러가는 대로 두지 않고 작은 실천부터 시작해본다. 어제는 무너졌다면 오늘은 조금씩 일으켜본다.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과 연결한다.


뭐든 스스로 해내고 싶은 마음은 건강하고 바람직하지만 나에겐 그런 의지가 잘 생기지 않았다. 대신 가까운 이들과 소통하며 함께 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우울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속으로 쌓아두지 않고 믿을만한 사람에게 털어놓으며 극복한다. 글을 써야 하는데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면 글쓰기 모임을 만든다.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은 걸 감지할 때 남편에게 오픈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해결의 시작이니까. 반대로 누군가가 내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속을 털어놓는 것 역시 기꺼이 받아주고 그와 한 편이 되어줄 수 있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에서 누군가와 뜻을 나누고 도움을 주고 받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지. 불안정한 시기에도 누군가와 연결된 느낌만으로도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일을 할 때는 불신이 확신을 만든다.


강의를 하려면 내가 가르치는 내용이 맞다는 확신이 꼭 필요하다. 수강자에게 확신있게 말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이게 옳다고 생각하는지,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의심하고 질문한다. 내가 틀릴수도 있다는 불신 덕분에 확신이 설 때까지 내용을 만든다. 일을 할 때에는 일상의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성숙한 사회인의 껍데기를 입는 것 같다. 이 껍데기 또한 점점 내가 되었다.




자기확신과 자기불신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면 나는 아마도 조금 주저하다가 자기불신을 취하지 않을까. 도무지 믿을 구석이 없는 나를 채근하며 살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니 꽤 유연한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이 모습이 마음에 든다.



스스로가 형편없이 느껴지는 '그때',

속절없이 무너지는 ‘그때’를 보내며 이 글을 썼다.


나를 미워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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