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엄마의 육아
아이가 자기주도학습 하기 원하시죠?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딱 한 가지만 하시면 돼요.
침을 꼴깍 삼켰다. 엄마들을 낚는 마법의 단어 자기주도에 이끌려 클릭한 영상이었다.
바로, 계획표를 쓰게 하는 겁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죠.
처음에는 엄마가 먼저 만들어주시고요, 다음부터 아이들이 스스로 계획표를 쓰게 하세요. 엄마는 ‘계획표에 쓴 거 다 했어?’ 확인만 하시면 돼요.
결국 이거였어? 그냥 닫으려다 더 들어보기로 했다.
제가 이런 말씀드리면요 엄마들이 그러셔요. ‘아유, 우리 애한테 그거 쓰게 하다가 홧병 생겨요’ ‘계획표대로 할 수 있는 애였으면 여길 오지도 않았어요’
그런데요 일단 한 번 시작해 보세요. 처음에만 잡아주시고 작은 성취에도 칭찬 많이 해주세요.
피식 웃음이 났다.
‘그게 되겠어? 엄마인 내가...’
가슴이 꽈악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 ADHD인데. ’
홧병이라면 나도 걸려본 것 같다. 내 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 때문에.
영상 속 선생님은 자기 주도학습을 하는 아이로 키우려면 계획을 세우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는데, 나에게 ‘계획성’이란 남들은 봤다고 하나 나는 본 적이 없는 전설의 포켓몬 같다는 게 문제다. 나도 못 해본 걸 아이에게 시킬 수 있을까? 내가 아이의 계획표를 매일 써줄 수 있을까? 새해 다이어리를 사두고선 2월을 넘겨본 적 없는데? 매일 반복해서 밥 짓는 것도 힘들어서 남편에게 떠맡겼는데? 할 일이 넘쳐나도 스마트폰을 끄지 못하고 유튜브에 영혼을 맡긴 채 밤을 새우는데?
그러자 화살 같은 두려움이 가슴에 꽂힌다.
만약 내 아이가 계획성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건 내 탓이겠구나.
나는 계획이 싫었다. 굳이 그걸 시작했다가 스스로의 저열함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계획을 세워봤자 지키지를 못하니까. 꼭 해야 할 일일수록 의욕이 사라지니까. 그렇게 계획이 무너질 때 못된 쾌감을 느끼니까. 의무 앞에서 나를 쓰러뜨리는 그 저항감을 설명할 수 없어 그저 스스로를 혐오했다. 약속된 시간, 숙제 제출 기한이 다가올 때면 불안해하며 딴짓을 했다. 더는 미룰 수 없을 때까지 버티다 벼랑 끝까지 가야 정신없이 과제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기한을 넘길 때의 쾌감을 알게 되었다. 마감 시간 이후의 세상에는 죄책감과 열패감, 그리고 미쳐버린 자유가 있었다. 나는 벌 받아도 싸니까 감점도 비난도 마땅했다. 그렇게 사춘기 자의식 회로에 심각한 버그가 생겼고 아직도 그걸 다 고치지 못했다.
육아에는 일관성이 중요하다거나 아이에게 좋은 습관을 길러줘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눈앞이 캄캄하다. 일관성, 좋은 습관, 꾸준함. 그것이 내게도 있긴 있을 텐데 나는 왜 이렇게 자신이 없을까. 되짚다 보면 결국 과거의 버그를 다시 만난다.
여기 트랙이 있다고 하자. 출발선에는 <계획>, 도착지엔 <실행 완료> 팻말이 붙은 트랙. 도착지의 팻말은 유독 영광스럽게 반짝인다. 도착만 하면, 그러니까 계획대로 실행만 하면 누구나 손목에 ::멋진 인생:: 도장을 찍어준단다. 출발시간도 중요하지 않다고, 도착만 하면 된단다. 모두가 트랙 위를 달리고 있는데 누군가는 문제없이 금방 도달하고, 혹은 비틀거리며 겨우 다다른다. 그 도장이 멋있어 보여서 나도 달려보기로 한다.
의욕적으로 출발한 뒤 씩씩하게 뛰어다가 ‘이제 끝까지 가야지’ 생각한 순간 양다리에 모래주머니가 5킬로그램씩 척척 붙는다. 이걸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더 무거운 팩이 하나씩 더 추가된다. 멈춰서 이걸 떼어보려 애쓰다 문득 트랙 바깥 풍경에 눈이 간다. 어, 저기 귀여운 개구리가 있네? 예전에 개구리가 나오는 만화를 재밌게 본 기억이 난다. 문구점에서 그 개구리가 그려진 공책을 샀었지. 옆에서 친구가 그게 뭐가 귀엽냐고 했는데 그 친구는 지금 잘 지내나? 저번에 취직했다고 들었는데. 생각난 김에 전화해 볼까? 슬그머니 트랙 바깥으로 걸어 나온다. 그러자 모래주머니가 툭툭 떨어져 나가 한결 가뿐해진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친구와 신나게 수다 떨고 문득 떠올린다. 아, 나 지금 계획적으로 살아야 하는데. 또 실패했어. 난 좀 혼나야 돼. 그리고 다른 사람들 손목에 찍힌 도장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게 뭐. 어차피 다 받는 거라 큰 의미는 없어. 그냥 도장인 걸. 목표를 이룬 게 더 중요하지.
그리고 다음 경주에 참여하러 가버린다. 나는 개구리가 폴짝폴짝 뛰는 모습을 멀거니 보다가 드러눕는다. 멋진 인생으로 인증된 누군가는 나에게 게으름이 문제라고 한다. 의지와 열정이 부족하다며, 도착만 하면 되는데 왜 그걸 못하냐고 묻는다. 모래주머니 얘기를 해봐도 다 핑계라며 무시한다.
나 같은 사람도 움직일 방법이 있긴 하다. 뒤에 사나운 늑대가 따라오는 것. 뛰다가 걷다가 나도 모르게 늑대의 존재를 잊어버린 채 중간에 딴 데를 보면 뒤에서 늑대가 신발을 물어뜯고 바짓단을 찢어야 한다. 그래야 나는 정신 차리고 끝까지 갈 수 있다. 그런데 겨우 도착하고 나니 늑대에 쫓겨 온 사람은 멋진 인생이 아니라고 한다. 그건 자발적인 경주가 아니라고. 그럴 만도 하다. 쫓겨온 내게도 성취감이 없었으니까. 늑대에 쫓기는 삶이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트랙에서 제 발로 나가버린 다. 이런들 저런들 나는 이 트랙을 완주할 깜냥이 못 되는 것이다.
자녀에게 할 일 계획표를 만들어주라는 강의는 내게 ‘승진하는 법’만큼이나 무의미했다. 나는 회사에 다니지 않으니까. 포기가 아니라 그냥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아이의 계획표를 만들어주는 걸 계획하다가 슬그머니 관둘 것이 빤하다. 영상 속 선생님이 이러면 자녀 교육은 네가 다 망칠 거라고 으르렁거리며 따라와도 나는 그 트랙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계획과 실행으로 빛나는 ‘갓생’ 트랙은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잘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본다. 내가 선택한 트랙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지만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는 안다. 밝게 웃는 미래의 너. 몸과 마음이 건강한 너.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너.
두 아이 마음속 작은 버그라도 다 잡아내고 싶어서 오늘도 달린다. 내가 스스로를 용납하며 얻은 힘으로 아이들을 용납하며 살아야지. 아이의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하고, 하고픈 말은 한 번 더 참을 것이다.
오늘은 큰아이가 같이 춤추자고 해서 신나게 덩실거렸다. 그러다 둘째가 춤 그만 추고 자길 보라고 해서 열심히 손뼉 쳐줬다. 계획표는 없어도 이 정도면 꽤 멋진 인생이다.
작년에 이 글을 쓰고, 올해 신기하게도 작은 루틴이 생겼다.
큰아이에게 학습지를 하루 3장씩 풀게 하고 있다. 매일 빼놓지 않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평일은 저녁 먹고 틈 날 때마다 [수학 학습지3장+영어 영상30분]세트로 제안한다. 남편이 이 부분을 잊지 않고 챙겨준 덕분에 이제 루틴이라고 조심스레 말해도 될 것 같다.
아이가 학습지를 풀 때마다 나는 옆에서 다이어리에 일기를 쓴다. 며칠씩 밀린 걸 몰아 쓸 때도 많지만 그래도 계속 쓰다 보니 4월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오늘 먹은 음식이나 일어난 일 따위만 적고 있지만 무언가를 꾸준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양감이 든다. 며칠 놓쳐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이도 나도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