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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Mar 29. 2024

고집이 없는 사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의 아름다움



MBTI 정 반대, 성향도 정 반대인 나와 남편은 신기하게도 좀처럼 싸우지 않는다. 어느 날 아이가 이렇게 물었다.

“엄마 아빠는 왜 안 싸워요? 다른 애들 엄마 아빠는 다 싸운대요.”

사실 싸우지 않으려 노력한다기보다는 애초에 싸울 일이 많지 않은 편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서로 생각이 달라 자주 대립한다는 어느 부부가 우리에게 물었다. 각자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 있으니 살다 보면 고집이 드러나지 않느냐고. 그 말에 남편이 대답했다.


“보영이는 고집이 별로 없어요.”


그가 나를 이렇게 생각해왔구나 싶어 놀랐다.


‘나 고집 있는 것 같은데. 아닌가?’

‘그간 너무 줏대 없이 살았나?’

‘이거 칭찬이야?’



어릴 적부터 성급하고 실수가 잦아 자주 지적받으며 자라다 보니 내 판단에 늘 자신이 없었다. 얼마나 자신이 없냐 하면 오래전에 내린 판단들에도 ‘그게 옳았을까?’ 헷갈릴 정도이다. 더 정확히는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상황을 살피고 플러스와 마이너스 요소를 고려해 ‘이거다!’ 싶은 결과를 도출하는 사람을 쭉 동경해 왔다.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따라가는 것. 그러면서 생긴 방식들이 자기만의 기준과 고집이 되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고 부럽다. 괜찮은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자기 고집이 있느냐에 달리지 않았을까. 자기만의 방식, 기준, 의식을 가진 사람.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SNS나 유튜브 속에서는 모두가 전문가 같아 보인다. 보통의 양육자들도 자기만의 강점을 살려 컨텐츠를 만드는 시대. 자신만의 노하우를 전달할 수 있는 집밥 전문가, 살림 전문가, 인테리어 전문가, 자녀교육 전문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노하우는 곧 그분들이 세운 기준이기도 하다. ‘이럴 땐 이렇게!’를 많이 아는 사람은 늘 신기하고 부럽다. 저걸 다 어떻게 알고 지켜왔을까. 기준을 정하는 것도, 또 그걸 지켜내는 것도 쉽지 않은 나는 고집을 부리고 싶어도 부릴 수가 없다.



자신이 정한 기준을 굳게 지킨다는 점에서 ‘뚝심’도 고집과 비슷하게 쓰인다. 차이가 있다면 고집과 달리 ‘뚝심 있다’는 말은 칭찬처럼 들린다는 점.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면서 자기 기준을 지키면 고집. 고집을 지킨 결과 성취를 거두었다면 그때부터는 뚝심. 야구에서도 그렇다. 감독이 투수 교체를 하지 않아서 팀이 패배하면 그는 무능하고 고집스러운 감독이 된다. 반면 교체 없이 한 투수가 승리를 지키면 다음 날 스포츠 기사에 ‘감독의 뚝심 빛났다’ 같은 타이틀이 붙는다.



그 뚝심이 없어 고민이던 시절이 있었다. 나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은커녕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기준들이 딱히 없었다. 머릿속 생각들도, 눈앞의 집안일도 조직화하는 것이 늘 어렵기 때문일 테다. 가령 청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합리적인 소비인지, 조직에서 어떤 태도로 일을 수행해야 하는지, 옷을 어떻게 구입하고 관리하고 입어야 하는지,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어떤 말로 대응해야 하는지까지도. 무언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혹은 미래를 준비하는 건 무엇인지 같은 생활의 자잘한 면에서 명확히 대답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의 언니는 이 모든 부분에서 자기만의 기준과 대답을 가진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청소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언니에게 핀잔을 자주 들었는데, 내가 이불을 깔면 언니는 바닥에 먼지와 머리카락이 그대로 있는 채로 이불을 깔면 안 된다며 당장이라도 쥐어박을 듯이 화를 냈었다. 이불을 깔기 전에는 반드시 바닥 청소를 해야 한다고. 졸리면 그냥 이불 좀 깔 수도 있지 않나? 왜 꼭 그렇게 해야 하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까지 좀 오래 걸렸다.

몇 해 전 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던 날에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왜 베개랑 이불 디자인이 다 달라? 둘이서 자는데 왜 베개 다섯 개를 꺼내?”

언니는 이 광경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힘들다고 했다. 언니 말을 듣고서야 이불과 요, 베개 다섯 개가 전부 다른 디자인이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일관성 없이 중구난방인 침구에서 나를 본 것 같아 부끄러우면서도 웃음이 났다. (나중에 침구세트를 구매하면서 나름 일관성이 생겼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뚝심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내겐 나만의 표현, 혹은 방식, 혹은 리추얼 등 정해놓은 기준이랄 것이 딱히 없다. 글을 쓰거나 음악을 만들 때에도 대부분은 직감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다. 그래. 뭐 직감도 좋고 자유로운 것도 좋다. 하지만 적어도 창작 습관을 꾸준히 유지하는 뚝심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인터뷰이가 되는 망상을 해보는데 아직 아무도 나를 인터뷰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그날에 밑천이 드러날 걸 걱정한다. 언제 글을 쓰냐, 영감을 어디서 받느냐 같은 질문에 멋진 예술가답게 대답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아도 막상 대답할 거리가 없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고 있으니 누군가와 각을 세울 일이 많지 않다. 남편과 사이좋게 지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나는 고집이 없는 대신 유연해졌고 기준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남의 말을 잘 듣는다. 어쩌면 나는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는 황희정승적 인간, 달지도 짜지도 않은 맹물적 인간일지 모르지만 이제 와 나만의 대답을 만들고 기준을 세운들 그게 과연 편안할까? 나는 이 헐랭한 옷이 좋은데 꼭 불편한 옷을 입어야 하나?



꼿꼿한 기준이 좀 없으면 어떤가. 문어는 딱딱한 뼈로 몸을 세워 걸을 수는 없지만 흐물거리는 몸으로 좁은 구멍도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줏대가 없어 고민이던 나는 문어처럼 어디서든 쉽게 적응하고 융화할 수 있었고, 갑작스러운 변화, 혹은 결정을 번복해야 할 때에도 주저하지 않고 직감이 이끄는 방향으로 간다. 집을 깔끔하게 정리하거나 꼼꼼하지 못해도 스트레스받지 않고 재즈처럼 살아가는 이 삶이 나는 좋다. 지혜롭고 따뜻한 이들이 곁에 있으니 스스로의 판단에 자신이 없어도 괜찮다. 어쩌면 태생부터 나는 뚝심과 고집대신 '팔랑 귀'와 유연한 자세를 가져야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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