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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Mar 22. 2024

감추고 싶은 기억

어린 나와 화해하기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수치심이 먼저 든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때에도 스스로를 창피하게 여긴 것 같다. 그 생각에 어찌나 강력하게 붙들렸는지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나와 화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회화되며 어느 정도 정돈된 스스로가 꽤 마음에 들었던 나는 과거의 나를 타인처럼 여기며 선을 긋고는 했다.



성인 ADHD를 알게 되면서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던 멍청한 행동들이 실은 증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병원에서 검사와 진단을 받고 난 후 구원과 절망이 동시에 찾아왔다. 내 정신이 썩어 빠져서 그랬던 건 아닌 셈이군, 한데 이 썩어빠짐 자체가 병 아닌가? 그럼 실제로 정신이 썩어빠지긴 한 거네? 병은 나를 자유롭게 하다가도 단단히 가뒀다. 혼란 속에 병원을 나서며 조금 울고 나니 안도감이 들었다.

‘이왕이면 이유 있는 멍텅구리가 되는 게 낫지.’



새로운 맥락에서 나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싶어서, 부끄러워 덮어둔 기억 조각들을 꺼내 하나하나 이어 보았다. (부끄러운 기억만 모은 것이다. 이게 내 전부는 아니다.)




"쟤는 애가 참 산만해. 그치?"

내가 ‘산만하다’의 뜻도 몰랐을 때부터 양친은 나를 두고 ‘산만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앞서 두 아이를 키울 때는 이런 경우가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혼자 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부모님의 얼굴이 생각난다. 내가 다 큰 뒤에도 몇 번이나 그때의 증언을 들었다.

"너는 놀이 하나를 쭉 이어서 하는 법이 없고, 꼭 여기서 쪼끔 하다가, 또 저기서 쪼금 하고 돌아다니면서 물건들을 여기저기 다 흘리고 다녔어."



설명하기 어려운 충동이 의지를 뚫고 나올 때도 있었다. 여섯 살이었나, 추운 겨울이었다. 슈퍼마켓 석유난로에 빙 둘러선 아이들이 손을 녹이고 있을 때 나는 방금 구입한 삼립빵을 난로에 데워 따뜻하게 먹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고 즉시 빵을 난로 위에 얹었다. 비닐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로. 기분 나쁜 냄새와 연기, 당황한 눈빛들 속에서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난로 열기에 빵 봉지가 다 녹아서 눌어붙는 바람에 빵은 먹지도 못하게 됐다. 가게 주인은 얼마나 난감했을까.



수치심을 느낄 때의 얼굴 근육 움직임과 피부 밑 혈관의 온도, 심근의 떨림을 나는 안다. 모든 어린이가 티 없이 해맑은 건 아니다. 어딘가 모르게 그늘진 아이들은 웃을 때에도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을 보인다. 누군가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걸, 언제라도 갑자기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그들은 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 그것이 아이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면 아이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온전히 펼치길 매 순간 주저하게 된다. 자주 지적받거나, 평가 내리는 말을 많이 들으면 그렇게 된다. 내가 그랬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좋아서 자꾸 선생님 책상 주변을 맴돌았다. 그건 뭐예요? 지금 뭐 하세요? 오늘 뭐해요? 저 이거 알아요. 그만 들어가라고 해도 배실배실 웃으며 실없는 말을 종알종알 거리며 선생님을 귀찮게 했다. 결국 선생님이 크게 화를 냈다. 깜짝 놀라 돌아선 등 뒤로 선생님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린 것인지, 선생님은 학기말 통지표 담임 의견란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간섭이 심함'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더 하고 싶은 마음을 이제는 안다.

-이래도 나를 좋아할 수 있나요?

-이래도 나를 사랑해 줄래요?

사랑받는 방법을 몰랐던 아이는 이 일로 스스로를 더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학령기 내내 부모님은 일하느라 늦게 오셔서 숙제 한 번 봐준 적이 없었다. 사춘기였던 자매들도 각자의 고뇌를 안고 살았다. 저학년 때는 통학을 함께 하던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학교와 먼 동네로 이사하면서 혼자가 되었다. 학원 다닐 형편도 아니었기에 하교하면 혼자 버스를 한 시간 동안 타고 집에 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항상 그랬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타인의 인정에 존재를 걸었다. 나는 인정받고 싶어서, 친구들을 웃기고 싶어 안달 난 아이였다. 무리수를 던지고 선을 넘어서라도 누군가 나를 보고 웃어주길 바랐다. 그걸 재치 있다고 여겨주신 선생님들도 계셨지만 정색하며 싫어하던 분도 있었다.


5학년 때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대본을 모둠원들과 낭독해서 녹음하는 숙제가 있었다. 한 막이 끝나고 다음 막이 이어지는 사이가 허전한 것 같았다. 당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명작 드라마 '모래시계'의 배경음악을 직접 노래로 부르기로 했다. 웃기고 싶다는 욕심에 내가 가사를 만들어 불렀다.

너 죽고 나 살자 / 나 살고 너 죽자 / 너 죽고 나 살자 / 둘 다 죽자

(쓰면서도 아찔하다)

친구들과 키득키득 웃으며 즐겁게 숙제를 마쳤다. 이걸 들으면 우리 반 애들이 막 웃겠지?


모둠별 과제를 확인할 때 이 부분이 흘러나오자 예상대로 아이들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눈이 확 커지더니 이 부분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 큰소리로 나를 비난하고 질타했다. 너 때문에 너희 모둠은 숙제를 안 한 걸로 하겠다고, 점수를 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 희곡이 죽음을 소재로 한 것이긴 했지만 그것을 희화화하지는 말았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너 죽고 나 살자 같은 말은 예나 지금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흔하게 나오기 때문에 어렸던 나는 옳고 그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 그때 그걸 가르쳐주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저분이 나를 싫어한다는 직감이 왔고 그저 혼자 조용히 수치감을 삼킬 뿐이었다. 이제 와 짐작컨대 나처럼 나대고 오버하는 아이를 못 견디는 분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나름 인기 좋은 부반장이었으나 선생님에게 자주 지적을 받으면서 아이들이 점점 나를 따돌리는 걸 감지했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두발 자유화가 됐다지만 내가 중학생일 때는 '귀 밑 3센티'를 유지해야 했다. 중학교 2학년 새 학기를 앞두고 미용실에 갔는데 갑자기 이 모든 게 짜증이 나서 남자애처럼 숏컷을 해달라고 했다. 어차피 예쁘지도 않은데 멋있게라도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 후 3년 내내 숏컷을 유지하며 남자애처럼 옷을 입고 다녔다. 사춘기답게 크고 작은 사고도 쳤다. 인생 첫 음주도 중2 때였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도시락을 까먹다가 교무실에 불려 가 주의를 듣기도 했다. 당시 반장이었던 나를 보며 담임 선생님이 기가 막히다는 듯 너까지 그러면 어떡하냐고 하셨던 게 기억난다.



“너 사오정이냐?”

“쟤 완전 사오정이야.”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일이 다반사였다. 누군가 지시할 때 못 알아듣고 네? 네? 몇 번씩 되묻다가 혼난 적도 많다. 사실 말이 안 들린다기보다는, 소리는 들리는데 머리에 입력이 안 된다고 할까. 언어의 정보값이 휘발된 소리로 뭉개져서 들리는 것이다. 긴장되는 상황일수록 더욱 심해졌고, 두세 번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 높은 확률로 상대방은 화를 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말이 안 들릴 때마다 순간적으로 분위기를 보고 맥락을 파악하여 대충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는 법을 익혔다. (지금까지도 이럴 때가 있고 나는 전보다 능숙하게 ‘알아들은 척’ 한다)




중학교 때까지는 성적이 꽤 괜찮았으나 고등학생이 되면서 곤두박질했다. 더 이상 벼락치기가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단기 기억력과 순간적인 집중력이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 집중력을 길게,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고등학교 성적은 노력에 들이는 시간에 비례한다는데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스스로의 힘으로 끝까지 풀어낸 문제집이 단 한 권도 없었다. 학교든 독서실에서든 이 책 저 책 들추고 일기도 쓰다가 음악을 듣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수시로 밖을 드나들며 통화를 하고 간식을 사 먹었다. 자기주도와 거리가 한참 멀었던 나는 벌판 한가운데서 아무 데나 뛰어다니는 망아지 같았다.

수능이 끝난 후 독서실 사물함을 정리해야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그 독서실이 폐업할 때까지 책을 가져오지 못했다. 집에서 고작 도보 2분 거리였음에도. 이 또한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다.





내가 너무 별로라고 생각했다. 뭐 하나 마음먹은 대로 해내는 법이 없고 실수투성이에다 나대기 좋아하고 남의 인정에 목을 매는 내가 싫었다. 모든 기억을 하나의 진단명으로 묶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진단명이 어린 나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됐다. 돌봄 바깥에서 불안해하고 실수하고 스스로를 미워했던 어린 보영을 이제는 안아줄 수 있다.









(배경사진: UnsplashPriscilla Du Preez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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