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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Mar 08. 2024

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어린 나에게, 어린이와 사는 나에게

나는 말하기 좋아하는 아이였다. 인정 받는 일에 늘 목이 말랐고, 남을 웃기고 싶었다. 재미있어 보이는 일에는 열정이 있었지만 누군가가 시키는 건 하기 싫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딱 이 정도의 이유였다. 모든 행동에 이유를 가지고 있는 어린이는 흔치 않을 텐데도 어른들은 나에게 붉은 얼굴로 정색하며 물었다. 왜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거야?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하라고 하는 걸 왜 안 하는 거야?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었던 아이는 자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게… 나는 왜 이럴까?






이제 나는 어른이 됐다. 일이 꼬이거나 마음이 평소 같지 않을 때, 그러니까 대체로 어둡거나 가라앉거나 울적해질 때면 글을 쓰고 싶다. 바로 실행하기 어렵다면 허공에 글을 쓰는 마음으로 문장들을 떠올린다. 비를 맞으며 순이 돋는 것처럼 비관의 글쓰기로 나는 자라났다. 안개를 헤치고 미지의 숲을 헤매는 그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혼자 글을 쓰고 내면의 지도를 만들며 스스로를 알아갔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를 통과한 시간들이 프리즘처럼 여러 빛깔로 펼쳐지면 그중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만 주목하는 습관이 생겼다. 한낮에 길을 걸을 때 햇빛의 색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듯 밝음은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구름이 해를 가려야 문득 하늘을 쳐다보는 것처럼 나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의식했다. 셀 수 없는 생각들이 스치는 와중에도 나는 꼭 어둡고 누추한 생각들 앞에 굳이 멈추어 서서 이건 어디서 왔는지, 왜 여기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곤 했다. 우울은 그것을 더 깊이 파헤치도록 나를 매혹한다. 그러다가 다시 빛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 나아가려면 전보다 더 힘에 부친다.

'나는 왜 이럴까?'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매번 똑같은 돌부리에 걸리고



발상까지는 늘 즐겁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게 신이 나서 힘든 줄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꾸준히’ 하려 마음 먹는 순간 낙하산을 매고 바람에 맞서 달리는 느낌이 든다. 매일 반복적,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일수록 정신적으로 큰 반동을 겪는다. 그러다 그것을 깜빡 잊거나 미루거나 외면하게 되고 심한 자책과 배덕감을 느끼며 주저앉는다. 40대가 된 지금까지 수없이 겪어온 일상적인 패턴이다. 정리정돈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고, 사지를 움직일 반경을 살피는 감각이 부족한지 매일 부딪치고 다친다. 타인의 말이 정보값 없는 소리로 들릴 때가 있고, 정신이 우주로 산책나가듯 잠깐씩 멍할 때가 있다. 손에 쥔 무언가를 자주 떨어뜨린다. 사회화를 거치며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충동은 배제했지만 나를 해하는 충동은 아직 다 버리지 못했다. 결정한 바를 도무지 지키지 못하는 내가 너무 별로라고 생각했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즉 ADHD는 내 병명이자 일종의 기질이며 외면하고 싶다가도 기대게 되는, 내가 짊어지고 살아야 할 짐이다. 괜찮은 날과 망가진 날들 사이에서 잊지 말고 돌봐야 할 정신의 부위이다. 이것은 일상 속 군더더기에 숨어서 나의 존엄이나 믿음, 긍지 같은 중추를 붙들고 흔든다. 이것은 ‘정상’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내가 수준 이하라는 증거로서 발목을 잡는다. 부지런한 사람들의 세상 아래 주저앉도록 누르는 불가항력이면서 이따금 좋은 불꽃을 일으키는 힘도 된다. 이 진단 역시 나를 통과해 여러 빛깔로 펼쳐진다. 거기에는 어두움도 밝음도 있다.



‘육아에는 일관성이 중요하다’거나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만들어줘야 한다’와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내가 제대로 된 양육자가 될 수 있을까? 반복과 일관성, 꾸준함이 한 사람을 완성시킨다고, 전문가가 되려면 일만시간의 법칙이 필요하다고, 꾸준히 성실한 사람이 성공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반복과 꾸준함을 가장 어려워 하는 나는 닿을 수 없는 성실하고 아름다운 세상.

내게도 일관적인 부분이 있다. 그건 일관성 유지 불가의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 어떤 일이든 매번 똑같이 반복하는 걸 견딜 수 없는 것. 시작만 하고 도무지 끝을 맺지 못하는 것. 몸으로, 머리로, 말로 실수하는 것. 가장 편안한 시간에도 스스로를 불안해 하는 것.



2016년에 첫 아이를 낳고 다음 해에 에세이집 <내가 엄마가 되어도 될까>를 출간했다. 임신 전에는 엄마됨을 고민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임신-출산-육아의 단계마다 번번이 당황했다. 무지와 무념에서 비롯된 당혹감 때문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들을 어쩌지 못해서 글에 쏟아냈다. 그 글을 모아 책을 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았다. 이건 무지가 아니라 미지에 가깝다. 내가 몰랐던 건 바로 양육자인 나 자신. 나를 몰랐다. 그리고 이로 인해 향후 양육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걸 몰랐다.



결혼 전까지 내 문제는 혼자 안고 살면 그만이었다. 나와 정반대 성향인 사람과 결혼을 하면서 오히려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결혼 자체도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육아를 시작하며 전혀 다른 차원의 문이 열렸다. 성장하는 자녀에게서 어린 나와 닮은 점들을 확인할 때, 혹은 나의 엉망인 모습을 아이가 고스란히 지켜볼 때마다 두렵고 부끄러웠다. 그러다 보니 아이의 행동을 과대해석하거나 별 것 아닌 일에 발끈하거나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양육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에도 스스로 만든 두려움에 자꾸 걸려 넘어졌다.

'이 아이가 나처럼 되면 어쩌지?'



나는 왜 이럴까 vs 나 정도면 괜찮지



나처럼 된다는 건 무엇일까? 그런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두려움의 안개를 헤치고 들어가 본다.

수치감에 사로잡힌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이제는 그 시절과 화해할 여유가 생겼다. 30대를 지나며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꽤 만족스럽게 그것을 해낸다. 우울과 불안을 달래며 사는 방법을 안다. 증세를 인정하고 함께 살기로 하면서 괜찮은 순간들이 전보다 많아졌다. 스스로를 덜 미워하게 되었다. 실수에 의연해졌다. 나의 장점과 단점을 가르지 않고 하나의 존재로서 나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멈춰서 반성하고 다시 나아간다.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 예전보다 행복을 자주 느낀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삶이잖아? 나처럼 살아도 되는 거였네?'

여기까지 결론을 내리자 머리 속 비관 회로가 작동을 멈췄다.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앞으로도 이 마음을 잘 유지해야겠다.

잠깐, 뭘 유지한다고? 마음을? 내가? 아마 안 될 텐데?






'나처럼 살지 마'와 '나정도면 잘 살았지' 사이에서 여전히 비관과 낙관을 저울질하는 현재를 기록하려고 글을 쓴다. 나도 해낼 수 없는 루틴을 아이에게 지시해야 하는 딜레마에 대해, 양육자로서 건강한 생활인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괴로움에 대해, 아이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지만 나와 닮은 모습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든 마음에 대해 털어놓아야 할 것 같다.

"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가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입을 틀어막고 아이에게, 또 과거의 나에게 손을 내민다.


"네가 왜 그런지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아이의 찬란함을 보며 내 두려움이 뒤통수를 맞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두려움과 수치로 얼룩진 마음을 맑은 물에 담가 씻어내는 글을 쓰고 싶다. 그렇게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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