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보영 Mar 22. 2024

감추고 싶은 기억

어린 나와 화해하기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수치심이 먼저 든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때에도 스스로를 창피하게 여긴 것 같다. 그 생각에 어찌나 강력하게 붙들렸는지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나와 화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회화되며 어느 정도 정돈된 스스로가 꽤 마음에 들었던 나는 과거의 나를 타인처럼 여기며 선을 긋고는 했다.



성인 ADHD를 알게 되면서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던 멍청한 행동들이 실은 증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병원에서 검사와 진단을 받고 난 후 구원과 절망이 동시에 찾아왔다. 내 정신이 썩어 빠져서 그랬던 건 아닌 셈이군, 한데 이 썩어빠짐 자체가 병 아닌가? 그럼 실제로 정신이 썩어빠지긴 한 거네? 병은 나를 자유롭게 하다가도 단단히 가뒀다. 혼란 속에 병원을 나서며 조금 울고 나니 안도감이 들었다.

‘이왕이면 이유 있는 멍텅구리가 되는 게 낫지.’



새로운 맥락에서 나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싶어서, 부끄러워 덮어둔 기억 조각들을 꺼내 하나하나 이어 보았다. (부끄러운 기억만 모은 것이다. 이게 내 전부는 아니다.)




"쟤는 애가 참 산만해. 그치?"

내가 ‘산만하다’의 뜻도 몰랐을 때부터 양친은 나를 두고 ‘산만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앞서 두 아이를 키울 때는 이런 경우가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혼자 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부모님의 얼굴이 생각난다. 내가 다 큰 뒤에도 몇 번이나 그때의 증언을 들었다.

"너는 놀이 하나를 쭉 이어서 하는 법이 없고, 꼭 여기서 쪼끔 하다가, 또 저기서 쪼금 하고 돌아다니면서 물건들을 여기저기 다 흘리고 다녔어."



설명하기 어려운 충동이 의지를 뚫고 나올 때도 있었다. 여섯 살이었나, 추운 겨울이었다. 슈퍼마켓 석유난로에 빙 둘러선 아이들이 손을 녹이고 있을 때 나는 방금 구입한 삼립빵을 난로에 데워 따뜻하게 먹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고 즉시 빵을 난로 위에 얹었다. 비닐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로. 기분 나쁜 냄새와 연기, 당황한 눈빛들 속에서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난로 열기에 빵 봉지가 다 녹아서 눌어붙는 바람에 빵은 먹지도 못하게 됐다. 가게 주인은 얼마나 난감했을까.



수치심을 느낄 때의 얼굴 근육 움직임과 피부 밑 혈관의 온도, 심근의 떨림을 나는 안다. 모든 어린이가 티 없이 해맑은 건 아니다. 어딘가 모르게 그늘진 아이들은 웃을 때에도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을 보인다. 누군가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걸, 언제라도 갑자기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그들은 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 그것이 아이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면 아이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온전히 펼치길 매 순간 주저하게 된다. 자주 지적받거나, 평가 내리는 말을 많이 들으면 그렇게 된다. 내가 그랬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좋아서 자꾸 선생님 책상 주변을 맴돌았다. 그건 뭐예요? 지금 뭐 하세요? 오늘 뭐해요? 저 이거 알아요. 그만 들어가라고 해도 배실배실 웃으며 실없는 말을 종알종알 거리며 선생님을 귀찮게 했다. 결국 선생님이 크게 화를 냈다. 깜짝 놀라 돌아선 등 뒤로 선생님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린 것인지, 선생님은 학기말 통지표 담임 의견란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간섭이 심함'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더 하고 싶은 마음을 이제는 안다.

-이래도 나를 좋아할 수 있나요?

-이래도 나를 사랑해 줄래요?

사랑받는 방법을 몰랐던 아이는 이 일로 스스로를 더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학령기 내내 부모님은 일하느라 늦게 오셔서 숙제 한 번 봐준 적이 없었다. 사춘기였던 자매들도 각자의 고뇌를 안고 살았다. 저학년 때는 통학을 함께 하던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학교와 먼 동네로 이사하면서 혼자가 되었다. 학원 다닐 형편도 아니었기에 하교하면 혼자 버스를 한 시간 동안 타고 집에 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항상 그랬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타인의 인정에 존재를 걸었다. 나는 인정받고 싶어서, 친구들을 웃기고 싶어 안달 난 아이였다. 무리수를 던지고 선을 넘어서라도 누군가 나를 보고 웃어주길 바랐다. 그걸 재치 있다고 여겨주신 선생님들도 계셨지만 정색하며 싫어하던 분도 있었다.


5학년 때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대본을 모둠원들과 낭독해서 녹음하는 숙제가 있었다. 한 막이 끝나고 다음 막이 이어지는 사이가 허전한 것 같았다. 당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명작 드라마 '모래시계'의 배경음악을 직접 노래로 부르기로 했다. 웃기고 싶다는 욕심에 내가 가사를 만들어 불렀다.

너 죽고 나 살자 / 나 살고 너 죽자 / 너 죽고 나 살자 / 둘 다 죽자

(쓰면서도 아찔하다)

친구들과 키득키득 웃으며 즐겁게 숙제를 마쳤다. 이걸 들으면 우리 반 애들이 막 웃겠지?


모둠별 과제를 확인할 때 이 부분이 흘러나오자 예상대로 아이들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눈이 확 커지더니 이 부분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 큰소리로 나를 비난하고 질타했다. 너 때문에 너희 모둠은 숙제를 안 한 걸로 하겠다고, 점수를 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 희곡이 죽음을 소재로 한 것이긴 했지만 그것을 희화화하지는 말았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너 죽고 나 살자 같은 말은 예나 지금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흔하게 나오기 때문에 어렸던 나는 옳고 그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 그때 그걸 가르쳐주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저분이 나를 싫어한다는 직감이 왔고 그저 혼자 조용히 수치감을 삼킬 뿐이었다. 이제 와 짐작컨대 나처럼 나대고 오버하는 아이를 못 견디는 분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나름 인기 좋은 부반장이었으나 선생님에게 자주 지적을 받으면서 아이들이 점점 나를 따돌리는 걸 감지했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두발 자유화가 됐다지만 내가 중학생일 때는 '귀 밑 3센티'를 유지해야 했다. 중학교 2학년 새 학기를 앞두고 미용실에 갔는데 갑자기 이 모든 게 짜증이 나서 남자애처럼 숏컷을 해달라고 했다. 어차피 예쁘지도 않은데 멋있게라도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 후 3년 내내 숏컷을 유지하며 남자애처럼 옷을 입고 다녔다. 사춘기답게 크고 작은 사고도 쳤다. 인생 첫 음주도 중2 때였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도시락을 까먹다가 교무실에 불려 가 주의를 듣기도 했다. 당시 반장이었던 나를 보며 담임 선생님이 기가 막히다는 듯 너까지 그러면 어떡하냐고 하셨던 게 기억난다.



“너 사오정이냐?”

“쟤 완전 사오정이야.”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일이 다반사였다. 누군가 지시할 때 못 알아듣고 네? 네? 몇 번씩 되묻다가 혼난 적도 많다. 사실 말이 안 들린다기보다는, 소리는 들리는데 머리에 입력이 안 된다고 할까. 언어의 정보값이 휘발된 소리로 뭉개져서 들리는 것이다. 긴장되는 상황일수록 더욱 심해졌고, 두세 번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 높은 확률로 상대방은 화를 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말이 안 들릴 때마다 순간적으로 분위기를 보고 맥락을 파악하여 대충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는 법을 익혔다. (지금까지도 이럴 때가 있고 나는 전보다 능숙하게 ‘알아들은 척’ 한다)




중학교 때까지는 성적이 꽤 괜찮았으나 고등학생이 되면서 곤두박질했다. 더 이상 벼락치기가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단기 기억력과 순간적인 집중력이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 집중력을 길게,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고등학교 성적은 노력에 들이는 시간에 비례한다는데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스스로의 힘으로 끝까지 풀어낸 문제집이 단 한 권도 없었다. 학교든 독서실에서든 이 책 저 책 들추고 일기도 쓰다가 음악을 듣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수시로 밖을 드나들며 통화를 하고 간식을 사 먹었다. 자기주도와 거리가 한참 멀었던 나는 벌판 한가운데서 아무 데나 뛰어다니는 망아지 같았다.

수능이 끝난 후 독서실 사물함을 정리해야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그 독서실이 폐업할 때까지 책을 가져오지 못했다. 집에서 고작 도보 2분 거리였음에도. 이 또한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다.





내가 너무 별로라고 생각했다. 뭐 하나 마음먹은 대로 해내는 법이 없고 실수투성이에다 나대기 좋아하고 남의 인정에 목을 매는 내가 싫었다. 모든 기억을 하나의 진단명으로 묶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진단명이 어린 나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됐다. 돌봄 바깥에서 불안해하고 실수하고 스스로를 미워했던 어린 보영을 이제는 안아줄 수 있다.









(배경사진: UnsplashPriscilla Du Preez �� )


이전 02화 흑역사에도 맥락이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