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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Apr 05. 2024

빨강머리 앤처럼 살고 있구나

실수투성이 VS 새 출발 애호가



같은 생각을 반복하면 사고방식이 되고 그것은 곧 판단을 지배할 수 있다.

뭇 연구자들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자리를 밟고 가야 그곳에 길이 생기는 것처럼, 머릿속에도 생각의 길이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반복하면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부정 평가에 여전히 영향받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은 그것이 어느새 머릿속에 대로를 만들어놓지 않도록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난 너무 게으르다고, 어리석다고,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습관적 부정 평가로 흘러가려는 생각의 뒷덜미를 잡아 끌어내야 낙관을 향해 오솔길이라도 낼 수 있을 것 같다.


낙관으로 가는 길은 해석의 차이에서 온다. 행동이 느린 사람을 가리켜 “굼뜨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여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처럼. 발화량이 많은 사람에게 “말이 너무 많다” 혹은 “시끄럽다”라고 타박할 수도 있지만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거나 “다양한 생각을 한다”며 인정해 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건강한 자의식을 위해 사고의 흐름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모른 척하는 스스로를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나 해봤지. 비관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내면에서는 전투가 벌어진다. 비판할 이유를 잘 찾아내는 똑똑한 비관, 약간의 흐린 눈을 장착한 천진한 낙관. 이 두 자아가 매일 싸우는 것 같다.


할 일이 태산처럼 느껴져 무력감을 느낄 때에도 ‘낙관 자아’가 힘이 더 세면 그래도 웃을 수 있다. 세상에, 오늘이 기말고사인데 늦잠을 잤네? 하하하. 저번 과제는 냈으니까 이번 과제는 쉬어야지. 하하하! 어머, 낙제를 하다니. 하하하! 우울과 조증은 한 끗 차이인지 나를 미워하면서도 이 정신 나간 일상을 꽤 즐기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리랜서 집필 노동자로 일하게 되자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실수가 발생했다. 밤새 교정하던 원고 파일을 저장하지 않아 허무하게 날렸던 날, 습관처럼 자기 파괴적인 생각들에 허우적거리다 기적처럼 정신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날아간 원고를 되살릴 최고의 기회는 바로 지금이잖아? 어차피 다시 작업해야 한다면 작업 내용이 아직 휘발되지 않은 지금, 다시 시작해야 한다. 못난 나에 매몰되다 내용을 다 까먹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큰 손해인 것이다.



다시 시작. 비관으로 흐르는 생각을 틀어 다시 일어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같은 마음을 가져보기로 했다.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종일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느라 하루가 엉망이 됐다고 느끼면,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일어나 움직이면 된다. 글 써야 하는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낙심한다면


“돌아버릴 정도로 글이 안 써진다.”


라고 시작하는 글을 쓰면 된다.

오늘 아이들에게 배달음식을 먹여 죄책감이 든다면 내일 건강 튼튼 채소볶음밥을 만들어주면 된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스스로가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


세탁 종료알림음이 들리는데 미처 세제를 넣지 않았다는 게 생각나면,


‘괜찮아. 또 돌리지 뭐.’


야심차게 모닝 루틴을 만들어도 사흘을 넘기지 못하지만,


‘괜찮아. 내일 새로 시작하면 돼.’


이렇게 가뿐하게 바닥을 딛고 뛰어오르는 것이다.


낙관 자아가 콧노래를 부르는 꽃밭 같은 머릿속에서 비관 자아가 불쑥 튀어나와 소리치기도 한다.


“야! 너, 너무 자주 다시 시작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낙관 자아가 머리에 꽃을 달고 천진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나? 나 원래 새 출발 좋아해.
내 취미가 새 출발이야.




‘자꾸 실패하는’ 사람은 해석하기에 따라 ‘자꾸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왕이면 실패에 머무르지 않고 가뿐히 일어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SNS프로필에 ‘새 출발 애호가’라고 나를 소개했다. 아무렴 실수투성이보다는 새 출발 애호가가 더 낫지. 자괴감을 툭툭 털고 반성하고 새 마음으로 출발선에 설 때 내가 더 건강해진 것을 느낀다.


지금도 여전히 의무 앞에 주저앉을 때가 많고, 아이돌 영상 콘텐츠에 속절없이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지만 수치감에 사로잡혔던 과거보다는 ‘다시 시작하지 뭐’ 생각하는 지금의 뻔뻔한 내가 더 마음에 든다.






지금의 내가 낫다고 해서 과거의 자신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은 완강한 반대편에 가깝다.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내가 부끄러웠고 남몰래 미워하기도 했다. 특히 10대 전후의 나는 꼭 타인처럼 느껴져서 아예 남처럼 모른 척하고 싶기도 하다.


얼마 전 남편과 둘이 밥을 먹다 내가 물었다.

“생각만 해도 ‘이불킥’ 하고 싶은 기억이 있어?”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반 대표로 앞에 나와 춤을 춘 적이 있는데 악몽까지 꿀 정도로 창피했다고 한다.


나에게도 ‘이불킥 리스트’가 있다. 나는 나보다 힘들게 산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남들 앞에서 장담했던 일(인간의 고통에 대해 너무 몰랐음), 음악전공자에게 당신이 만든 악보가 틀렸다고 지적했던 일(내가 모르는 기호를 보고 틀렸다고 생각했음), 모 학교 선생님께 옆 학교 아이들을 평가했던 일(강의 경력 어필하려다 대박 실언) 등 지금 다시 꺼내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가 감춰둔 몇 가지 ‘이불킥’ 사연을 듣고 난 남편이 말했다.


여보는 되게… 빨강머리 앤처럼 살아왔구나.


“어?”

“앤은 실수를 많이 하지만 그렇게 점점 성장하잖아.”

그 순간 어둡고 못나고 축축했던 과거가 갑자기 벚꽃 휘날리는 화창한 에이번리로 바뀌는 것 같았다.



혹시 너도 ENFP였니…? (글썽)





실수는 그 자체로 스스로를 미워할 명분이 된다. 역시 나는 못났다는 굳건한 믿음의 증거로서 마음속에 실수담을 저장했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소금 알갱이 같은 작은 실망과 불신이 쌓이는 걸 방치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오랜 세월 머릿속을 휘돌다 소금기둥처럼 단단해진 것 같다. 주변에서 내 장점을 아무리 이야기해 준들 미움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남편이 무심코 건넨 말 한 마디로 오래된 미움이 스르르 무너지고 따뜻한 빛이 들었다. 그러자 그 너머에 외로운 한 아이가 보였다. 까불고 장난치고 싶어 선을 넘던, 눈치가 없어 말을 가리지 못했던, 예의 있는 표현법이 따로 있다는 걸 몰랐던,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증명하고 싶던, 그러면서 내가 별로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던, 실수할 때마다 수치감에 얼굴이 붉어졌던, 인정받기를 갈구했던, 사실은 너무나 불안했던, 따뜻하게 용납받고 싶었던 어린 나.



빨강머리 앤은 누군가의 눈에 그저 깡마른 주근깨투성이 여자아이겠지만 그를 사랑스럽게 여기는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 이야기 초반부에는 책 속의 어떤 인물도 앤을 사랑해주지 못했지만 적어도 작가만큼은 그를 사랑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작은 보영을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아 외로웠다면 지금이라도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오래 잊고 지낸 시간, 누렇게 바랜 풍경 속. 거기에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인 어린 내가 있다. 그 아이에게 다가가 말하고 싶다.


“나는 네 이야기가 궁금해.”


그 아이는 신이 나서 한껏 떠들다 문득 내 눈치를 살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눈을 맞추며 웃을 것이다. 괜찮다고, 더 말해도 된다고.

가족들이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씩 혼자 집을 지키고 동네를 쏘다니던 그 아이는 사실 무척 불안한 상태이다. 그러니 따뜻하게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같이 걸어줄 것이다. 네가 얼마나 재미있고 멋진 아이인지 몇 번이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다 헤어질 무렵 다정하고 분명한 어조로 예언할 것이다.



“난 네 미래를 알아.

너는 더 멋있고 건강한 사람이 될 거야.

네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이 늘 함께 할 것이고, 사랑스러운 가족들이 생길 거야.

너는 더 많은 행복의 모양을 경험할 거야.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사는

충만한 사람이 될 거야.”



그 아이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 보일 즈음, 마음 한편에 얼어붙었던 오랜 수치와 미움이 녹아 사라진다. 과거의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지금 들려주었을 뿐인데 봄이 왔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울고 있는 어린 나에게 말해본다. 모른 척해서 미안해.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 마음으로 꼭 안아준다.





아이를 키우며 울컥 화가 날 때, 내가 들어온 말들이 본능처럼 먼저 떠오르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며 새 길을 만든다. 내가 어릴 때 듣고 싶었던 말을 헤아려보면 조금 더 쉽다. 아이가 숙제를 미룬 채 딴청부리면 그 모습이 꼭 나 같아서 더 화가 나지만 그 시절 어린 나에게 필요했을, 하지만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말을 찾아낸다.


“숙제를 다 해낸 네 모습을 떠올려봐. 엄청 후련하겠지? 이거 다 마치면 진짜 기분 좋을 거야.”



이 정도면 똑똑한 비관 자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맞는 말이니까. 내 말에 마음을 굳게 다진 아이가 숙제를 끝내고서 환하게 웃는다. 거 보라고, 힘들었지만 결국 해내니까 짜릿하지 않냐며 신나게 칭찬했다. 내 마음에 사는 작은 보영이도 이 말을 들었겠지? 너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오늘도 꾹꾹 눌러 만든 새 길 가운데서 그 아이가 빨강머리 앤처럼 사랑스럽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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