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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Jan 09. 2018

존재를 환영해주기

육아는 '기브 앤 테이크'일까

              

내가 지금 이렇게 고생해도 얘는 기억조차 못 하겠지.


아이를 키우면서 이따금 생각한다. 부모의 사랑과 희생과 고생을 아이가 다 알아줄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계속해야 하는가? 물론이다. 육아에는 전폭적인 사랑은 물론, 신체와 정신의 에너지, 그리고 시간과 돈도 많이 들어간다. 사실 임신부터 비용이 든다. 각종 검사비도 만만치 않고, 임부복이나 속옷도 구입해야 하고, 음식도 더 좋은 걸 먹어야 하고, 아이가 태어나서 입고 쓸 모든 걸 준비해야 한다. 출산 역시 돈이 꽤 들지만, 이후 산후조리원에 가려면 최소 국립대학교 등록금만큼은 필요하다. 산후도우미를 고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아기가 살아가는 데에는 기저귀와 분유값만 필요하지 않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고, 아기의 상황에 맞는 생활용품과 장난감도 구비해야 한다. 이유식을 사 먹이든 만들어 먹이든지 어른들 먹는 만큼의 비용이 든다. 이렇게 나열한다고 해서 그게 아깝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아이는 우리에게 찾아온 귀한 손님이고, 사랑을 다 쏟아도 아깝지 않은 존재다. 아이가 성장하고 독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나는 힘과 지혜를 쏟아 키울 것이다. 돈도 필요하기 때문에 열심히 벌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하려고 나는 자녀를 낳았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가성비’가 소비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심지어 인간관계에 드는 비용도 가성비로 계산한다. 누군가를 위해 마음과 돈을 쓰기 전에 무엇이 되돌아올지 미리 계산하는 이들도 있다. 지나치지 않다면 크게 잘못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에도 ‘기브 앤 테이크’를 생각하는 부모들이 쉬 보인다. 양육에는 당연히 신체와 정신의 에너지가 들고, 돈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비용을 나중에 아이가 커서 효도하며 갚아주길 바라는 사람을 더러 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너 키우느라 이만큼 힘들었으니 나중에 효도해라.’
‘이번에 너 때문에 얼마가 들었으니 커서 갚아라.’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아이가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독립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양육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기브 앤 테이크는 두 욕망이 각자의 만족을 위해 서로 거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단 한 번도 부모에게 자신을 낳아달라고 요청하거나 부탁한 적이 없다. 영혼들이 빛처럼 떠돌다가 어느 부부를 보고 찾아가 묻는다고 생각해보자.


저를 댁의 자녀로 키워주시겠습니까?


만일 이런 과정으로 아이를 거두었다면 거래의 성립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출산은 오직 부모로부터 이루어진 일이다. 설령 부모가 원하지 않은 임신이었다고 해도 어찌 되었건 아이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존재하게 된 셈이다. 태어나버린 자는 생존을 위해 힘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밥을 달라며 울고 제 욕구를 채워달라고 울부짖는다. 이 탄생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 그 요구를 듣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게 부모 아닌가.



자녀 계획이 신중히 이루어져야 할 까닭도 여기에 있다. 부모는 의무로 가득 찬 업이다. 힘들게 낳아도 고생은 있는 대로 다하고 아이의 웃음과 사랑을 보상으로 받는다. 아이가 웃으며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행복해진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할 만큼 자라려면 얼마나 많은 울음과 짜증과 떼쓰기가 반복되는가. 기쁨은 육아의 본질보다는 ‘덤’에 가깝다. 그래서 텔레비전이나 SNS 속 아기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임신을 계획한다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 물론 먼저 직면한 뒤 그 안의 행복을 찾아가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알고 아이를 낳는 것과 모른 채로 현실에 부딪히는 것은 다르다. 적어도 ‘내가 고생한 만큼 아이가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아이를 갖지 않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다른 포유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일어나 걷고 젖도 금방 뗀다. 반면 인간은 무능력하고 의존적인 상태로 태어나 생존 기술을 배우기까지 너무도 긴 시간이 걸린다. 갑자기 존재하게 된 아기는 따뜻한 엄마 몸을 나와 세상과 마주하는데, 그가 앞으로 살아갈 이 세계는 도무지 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는 무섭고 광활한 곳이다. 신생아가 자라는 시간의 대부분은 사실 혼돈과 공포로 가득 차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기는 본능적으로 의존할 곳을 찾고, 그렇게 찾아낸 양육자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생존을 이어간다. 모든 인간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했다. 그 작은 몸으로 주어진 생을 붙들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기를 이 세상으로 불러낸 장본인이 부모다. 태어나길 원한 적도 없는 생명을 이런 혼돈의 세계로 불러냈으니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농담으로라도 아이에게 ‘키워준 만큼 갚으라’고 말하는 부모들이 없기를 바란다. 사실 우리도 알고 있지 않은가. 돌려받기를 바라는 사랑, 계산하고 있는 속내, 조건이 있는 호의가 얼마나 차가운지. 거칠게 표현하자면 아이에게 이런 말은 폭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발화자 본인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이 차가운 말을 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무래도 달갑지 않을 것이다. 정서에도 좋지 않을 게 분명하고.



그렇지만 가성비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힘써서 아이를 길러낸다면 아마도 아이는 갚을 것이다. 순전한 사랑을 받으며 그것을 배운 사람은 같은 방법으로 사랑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갓 돌을 지난 나의 딸도 엄마와 아빠를 사랑하고 있다. 우리를 보면 기분 좋게 웃어주고, 컨디션 괜찮을 때는 뽀뽀도 해주고,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진심으로 행복해한다. 가끔은 부엌일 때문에 당장 안아달라는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면 아이는 엉엉 울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 요구사항이 무시되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는데,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나를 붙든다. 수면교육을 한다고 혼자 방에서 울게 해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아준다. 아기는 전 존재로 부모를 사랑하고 때론 용서한다. 부모를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면 나는 충분히 되돌려 받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나의 사랑보다 아이의 사랑이 훨씬 깨끗하고 영롱하다 느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부모를 사랑해서 여러 모양으로 표현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내가 먼저 요구할 수는 없다. 그 순간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빛을 잃고 무거운 의무와 부담이 작용하겠지. 이런 결과는 원치 않는다.



아이의 존재 자체를 환영해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면, 희생과 의무로 가득 찬 것을 알아도 부모가 되고 싶다면, 자녀가 나중에 갚아줄 거란 기대가 없어도 스스로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이미 좋은 부모로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욕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마다 새롭게 다짐한다. 부모가 되면서 나 같은 사람도 높은 사랑에 도전할 기회를 받았다.












위의 글은 <내가 엄마가 되어도 될까> 책의 본문입니다.


'힘들게 낳아도 고생은 있는 대로 다하고 아이의 웃음과 사랑을 보상으로 받는다'라고 썼는데 요즘은 좀 다른 생각이 듭니다. 주제에서 약간 벗어난 이야기라 아래에 덧붙이겠습니다.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게 줄 수 있는 영향은 그야말로 지대합니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기도 하고, 대체 불가한 동력을 얻기도 하지요. 어떤 인격은 나에게 상처도 주고 사랑도 줍니다. 어떤 관계는 포기하고 싶지만 좀처럼 어렵기도 합니다. 이렇듯 다른 인격과의 관계는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색을 가졌습니다.


아기가 자라 인격을 형성하면서 저는 새로운 관계를 배우고 있어요. 아직 자기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의 눈에서 엄마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봅니다.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이 지쳐 무력감에 빠졌을 때, 제가 거기서 더 나락에 빠지지 않도록 아이가 지탱해준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웃음이 마른 날에도 아이를 보며 한 번 더 웃을 수 있지요. 아이는 제 존재만으로도 행복해하고 만족하며 이를 표정과 행동으로 투명하게 드러냅니다. 지금껏 이런 해바라기 같은 사랑을 받아본 적 있었나 싶어요. 성장의 증거를 발견할 때면 얼마나 기쁘던지요. 기쁨은 육아에서 얻는 덤이라고 했지만 위의 글을 썼을 때보다 저는 지금 훨씬 더 자주 기뻐합니다. 아이가 크면서 웃을 일이 더 많아졌어요.


이것은 보상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출산과 육아의 고된 과정을 내가 감당한 것과 아이와의 상호작용으로 얻은 기쁨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 아닐까요. 보상은 인과관계 안에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인과관계보다 기적에 가깝지요. 아이의 웃음과 사랑을 육아에 대한 보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겠다고 저는 요즘 생각하고 있습니다. 육아에 따르는 고생과 아이가 주는 기쁨을 분리시키자고 말이지요. 아이가 언젠가 부모에게서 분리될 때 실망을 표시하거나 대가를 강요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이가 장성한 뒤에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읊지 않겠다는 일종의 다짐입니다.)


그러면서 혼자 생각을 정리했던 것을 써보겠습니다.


1. 육아의 여러 과업은 내가 성장하며 익숙해지는 것이다. 지금 나를 지치게 하는 일 - 예를 들면 재우기, 먹이기, 달래기, 씻기기, 기관에 적응시키기 등 - 도 아이가 성장하면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다. 지금은 그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2. 아이가 자라며 내게 주는 사랑과 기쁨은 감격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때론 부딪치고 화가 날 때도 있지만 결국은 사랑으로 귀결되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아이를 한 인격으로 존중하도록 고민하며 실천하겠다.


3. 2는 1의 수행에 도움을 주지만 그렇다고 1의 보상인 것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2를 생각해서라도 1을 참고 견디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육아가 힘겹게 느껴진다 해서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4. 아이가 주는 기쁨과 사랑과는 별개로, 삶에서 또 다른 기쁨과 만족을 찾아보겠다. 내가 좋아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무언가를 찾는다면 그것이 나를 지탱할 것이다.



육아에 잠식되지 않는 건강한 삶과 미래를 위해 저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각자의 방법이 다를 수 있으니 한 번쯤 고민해보시면 어떨까요. 





지난 달, <내가 엄마가 되어도 될까> 북콘서트(with 싱잉앤츠)를 가졌습니다. 아이가 우렁차게 운 덕에 책 제목에 충실한 자리가 되었다는 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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