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로나 Feb 07. 2024

탱고 공교육을 꿈꾸다

- 좋은 교육이란 무엇일까?

나는 교육을 한 인간을 사회적· 민주적 존재로 길러내기 위해, 그리고 지구상의 생명체로서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으로 여긴다. 이때 필요한 지식과 기술이 무엇인지는 개인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이견이 있을 것이다.     


내 경우, 매해 5월마다 의아하다. 종합소득세를 신고하고 내는 법을 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지? 이렇게나 어렵고 복잡한데…. 처음 집에서 독립했을 때도 의아했다. 의식주가 삶의 필수 요소라고 가르쳤으면서, 왜 임대차보호법에 대해 자세히 교육하지 않았지?

  

살면서 의문스러운 점은 계속 늘어났다.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좋은 인간관계가 필요하고, 심리학적 지식과 기술이 많은 도움이 될 텐데 교과과정에서는 왜 소홀히 할까? 타인의 심리를 조종하고 이용하는 빌런들에게 당하고 나서 울며불며 심리학 서적과 유튜브를 찾아보는 길이 최선일까? 또한 가짜뉴스들이 빠르고 넓게 유통되는 것을 보면 현실적인 텍스트를 기반에 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더 강화돼야 할 것 같은데, 문해력 향상을 위한 텍스트의 선정은 현재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      


결론은 좀 더 실용적인 지식과 실습이 한국 교과과정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춤 역시 이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시대, 오래도록 즐겁고 건강하게 몸을 사용하도록 돕는 방법과 기술만큼 실용적인 것은 많지 않을 듯하다.     


- 탱고는 인간을 변화시킨다

나는 탱고가 나와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켰다고 느낀다. 좋은 교육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를 탱고로써 얻은 것이다.     


신체의 변화부터 말해볼까? 개선된 균형을 우선으로 꼽고 싶다. 나는 심하게 비대칭인 골반을 가지고 있었다. 치마를 입으면 자꾸 한쪽 방향으로 돌아가고, 왼쪽 어깨가 더 들려 있어 그쪽 브래지어 끈이 빈번히 어깨를 타고 흘렀다. 여기까지는 성가심 정도로 끝나는 문제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불균형이 몸의 통증까지 자아낸 것이다. 왼쪽 무릎과 오른쪽 어깨와 손목의 통증이 그것인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빈도와 정도가 커지고 있었다.     


탱고 3년이 지났다. 치마 돌아가는 일이 거의 없다! 여전히 브라 끈은 종종 한쪽으로 흘러내리고 주기적으로 당겨 올려야 하지만… 그 빈도는 줄었다. 변화는 탱고를 시작하고 2년이 지나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변화는 도수치료나 재활훈련 등으로도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탱고를 통하는 편이 훨씬 즐거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탱고 강사는 뒤로 걷기가 많이 포함된 탱고의 동작들이 몸의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을 줬을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많은 시간을 앉아서 보내고, 앉을 때 골반 주변부는 앞으로 굽어진다. 이것이 불균형한 방식으로 반복되면 몸에 무리를 주고 비대칭된 형태로 몸을 조형할 수 있다. 골반 주변부를 원래의 위치와 상태로 복원하는 법 중 하나는 뒤로 다리를 뻗는 것. 균형에 대해 인식하며 뒤로 뻗기를 반복한다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탱고에서 팔로워가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좋은’ 팔로워는 아니었다. 자주, 리더의 의도한 방향과 다르게 걸었다. 리더는 내가 직선으로 뒤로 가기를 의도했는데 사선으로 걷는 식이었다. 역시 골반 비대칭 때문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골반이 틀어진 각도가 걷는 방향의 각도까지 틀었을 테다. 이 문제를 인식한 뒤 뒤로 반듯이 걷기 위해 노력했다. 양쪽 골반의 위치가 수평인지 지각하며 골반을 앞뒤로 회전해 두 무릎이 스치게끔 걷기. 그렇게 의식적으로 뒤로 직진하는 시간이 쌓인 것이 근육을 균형적으로 발달시켰으리라 분석한다.     


몸을 쓰는 데 있어 균형감이 나아졌음도 체감한다. 탱고에는 한쪽 다리로만 서거나 몸을 회전시키는 동작이 많다. 이런 동작의 반복은 균형감각과 협응력(신체의 신경 기관, 운동기관, 근육 등이 서로 호응하며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을 개선시킨다. 내 머리로 생각한 나의 움직임과 실제의 내가 다르다? 의도와 달리 몸이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뚝딱거린다? 협응력이 부족할 가능성이 크다. 나도 그랬다.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탱고를 추는 시간이 쌓이며 나아진 부분이 있다고 감각한다. 내 몸을 좀 더 잘 지각하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감각을, 그에 따른 기쁨과 성취감을 탱고를 통해 느꼈다. 결과적으로 탱고는 신체뿐만 아니라 정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이 밖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많다. 춤꾼이자 신경과학자인 장동선과 줄리아 F. 크리스텐슨이 공동 저술한 책 <뇌는 춤추고 싶다>(아르테, 2018)를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탱고뿐만 아니라 여러 춤의 긍정적 기능을 소개하는 연구들이 소개돼 있다. 그 모든 연구 결과는 우리가 춤을 춰야 한다는 결론으로 흐른다. 책의 일부를 옮겨본다.     


뇌를 건강하게 하는 데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탐색한 수많은 연구들이 있지만 그 중에 다음의 답이 아주 자주 등장합니다. 사람을 많이 만나고 교류해라. 운동을 하고 몸을 많이 움직이는 것이 뇌의 성능을 높여 준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들을 억누르지 말고 표현하며 스스로 느끼고 이해해라. 재미있게도 춤을 추면 이 세 가지가 모두 일어납니다. 사람을 만나고, 몸을 움직이고, 감정을 표현하며 이해하죠. 그리고 리듬에 맞추어 나 자신을 변화해 가는 법을 배웁니다. 멈춰야 하는 순간에 멈추고, 빠른 스텝을 밟아야 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알게 되죠.


이처럼 유익한 춤인데, 왜 교육과정에서 충분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걸까? 내가 다닌 중학교에 무용 시간이 있긴 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무슨 장르인지 명확하지 않은 움직임을 원치 않는 무용복을 입고 클래식 음악에 맞춰 허우적대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마저 짧았고, 고등학교에는 그마저도 없었다.(나는 7차 교육과정 세대인데 이 세대 대부분이 이랬는지, 학교마다 달랐는지 궁금하다. 제보를 기다린다.)     


이런 의문을 예상해본다. 

"그런 부분은 각자 알아서 학습해도 되지 않나?"


기회의 평등에 대해 헤아려보았으면 한다. 경제·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라 예술 감상, 악기 연주, 스포츠 등의 경험으로 표현력, 절제력, 안정된 심리 상태 등을 가꿔간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가 여러 면에서 삶의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는 연구 결과를 접한 적 있다. 의롭지 못한 현실이다. 어떤 부모를 만나는지 여부는 노력과 상관없는 우연의 요소이고, 이러한 우연의 요소가 불러오는 차이가 삶을 살아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는 사회는 불의하다. 저소득 계층이거나 자식의 교육에 무심한 부모를 둔 자식일지라도, 세금으로 운영되는 무료 혹은 저비용 프로그램으로 관심 범위를 넓히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브레이킹’이 공교육 과정에 포함됐을 것이다.     



- 탱고는 왜 안 돼?

2023년 브레이크 댄스, 정식 명칭 '브레이킹'이 공교육 과정에 포함된 사실을 알고서 샘이 났다. 서울특별시교육청이 대한브레이킹경기연맹과 공식적인 업무협약을 체결함에 따라 초·중등학교의 방과후 학교 및 스포츠클럽에서 브레이킹을 배울 수 있게 된 일이다. 이제 학생들은, 브레이킹을 통해 신체 능력이 향상되고 창조성이 고양되며 정서적 만족이 실현되는 경험을 하기가 이전 보다 쉬워질 것이다. 브레이킹이 입시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배움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공교육에 속한다면 비교적 수월하게 아이들의 의지로써 경험의 폭을 넓히고 진로를 탐색할 수 있다.


탱고인들과의 대화 중 이 소식이 화제에 오르자 한참 나누던 대화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시선이 마주쳤다. 거의 동시에 비슷한 내용의 말이 튀어나왔다.


“탱고는?”


“탱고도 교과과정에 포함될 만하지 않나?”     


하지만 탱고가 공교육 과정에 속하기는 브레이킹보다 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탱고 공교육을 지지하는 탱고인조차 회의적이었다. 자신의 경험이 근거였다.


탱고인 Y는 고등학교 때 풍물패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는 여고를 이웃에 둔 남고에 다녔는데, 남고와 여고의 풍물패가 함께 연습하고 전국대회에 출전한 적이 있었다. 대회가 끝난 뒤 모두 어울려 웃고 떠든 추억은 아직도 기억 속에 빛난다. 그러나 “여자애들이 남자애들이랑 붙어서 시시덕대는 게 꼴보기 싫다.”든지 “학생이면 공부나 해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는 학부모들이 나타났고, 결국 교류는 단절됐다. 그런 학부모들이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탱고 배우는 걸 본다? 뒷목 잡고 쓰러져 실려 나갈 수 있겠다.   

  

Y의 지적을 듣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탱고 수업을 동성끼리 배우도록 개설하면 되지 않나?’ 였다. 리더와 팔로우 역할은 성별에 국한되지 않고 자질과 능력에 따라 주어져야 하므로 동성끼리도 수업 진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더 생각해보니 좀… 열받네? 이성끼리 가깝게 지내면 왜 안 되지? 지금 시대상을 보면 학창 시절 이성 간 교류가 잦은 게 오히려 더 교육적일 것 같은데. 종종 여자 손 한 번 안 잡아본 남자애들이 가상의 존재로서 여성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것을 목격할 때 안타까움을 느꼈다. 직접 경험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텐데…. 



다른 성별과 교류하고 관계 맺으며 서로에 대한 존중을 학습하게끔 하는 것,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는 하나의 방법 아닐까?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게 하고 관계 속에서의 균형을 배우게 돕는 탱고를 공교육 과정에 두는 일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모쪼록 교육청이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기를!          

작가의 이전글 주기적으로 무지렁이 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