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다 Oct 03. 2020

#03 기도하는 아기천사의 조각상

골동품점에 들어온 세 번째 물건


물건 주인의 말

이 천사 조각상을 옆에 두고 기도하면 기도가 더 잘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성당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지고 있었어요. 저는 이제 무신론자라 딱히 기도할 일이 없어서 팝니다.




가게 주인의 말

천주교 집안에서 유일하게 성당을 다니지 않는 나는 명절만 되면 가족의 잔소리의 피할 수 없다. 이번 추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당에 꾸준히 나가야 성공할 수 있다.” “성당에 다녀야지 좋은 남편을 만나게 해 주시지.” 와 같은 엄마의 이분법적인 훈계를 듣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므로. 이런 말들을 듣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줄곧 성당을 열심히 다니면서 알게 된 ‘신’은 굉장히 자비하신 분인데 내가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공'과 '좋은 남편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가신다고? 정말 그렇다면 그분은 자비하신 게 아니지 않나? 아무래도 엄마가 아는 신과 내가 아는 신은 이름만 같을 뿐 다른 분인 게 분명하다. 우리는 각자 신은 이러실 거야라며 자신의 바람을 투영시킨 존재를 믿고 있는 거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 가족 모두가 성당에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철없던 중학생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함께 고속터미널역 지하상가로 싸구려 액세서리를 훔치러 갔다. 우리는 몇천 원이 없었던 것도, 액세서리가 당장 갖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사춘기 소녀들이었다. 큰 맘먹고 훔쳤던 것은 천 원짜리 귀걸이 네다섯 개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들 중 마지막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가게를 빠져나와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도망가고 있을 때 누군가의 손이 나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아, 망했다.’라는 직감과 함께 그 손은 내가 손에 쥐고 있던 과자 봉투( 그 안에는 훔친 귀걸이가 들어있었다.)를 열어 보더니 나를 다시 가게 안으로 거칠게 끌고 갔다. 화가 난 가게 사장님은 너네 같은 애들이 뭘 배우겠냐며 책으로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고는 당장 엄마를 부르지 않으면 신고하겠다고 했다. 왜 때리시냐고 묻고 싶었지만 사장님 생김새가 매우 험악하기도 하고 잘못한 게 있는지라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 나 도둑질하다 들켰어. 엄마 보고 여기로 오래.” 하며 수치스러운 통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엄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가게 안으로 걸어왔고 내가 훔친 물건 가격의 10배가 되는 돈을 사장님에게 건네고 나서야 우리는 그 가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순간 엄마는 말했다.  


“고해성사하러 가자.”


가게 주인한테 들킨 것도 창피한데 엄마에다가 신부님까지 나의 죄를 알게 된다니 정말이지 끔찍했다. 반 강제로 엄마의 손에 이끌려 서울의 한 대성당에 도착한 나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 가림막의 구멍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신부님에게 내 죄를 고백하고 있었다. “귀걸이를 훔친 죄를 사하여 주소서...” 라며.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니 내가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게 종교의 힘인 걸까? 어느 정도의 자기 합리화와 함께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 자신의 약점을 고백하는 동시에 기댈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생긴다는 것 말이다. 가끔은 이 안정감 때문에 성당에 다니지 않으면서도 기도를 하곤 한다. 항상 그 기도의 마지막은 이렇다. “필요할 때만 찾아서 죄송해요. 뻔뻔하게 들리시겠지만 제발 이 기도를 들어주세요. 그럼 정말 감사드릴게요.”  


믿을 건 자기 자신밖에 없다지만 연약한 사람으로서 가끔은 답이 안 보이는 문제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징징댈 수 있는, 그리고 그 모든 고백들을 절대 누설하지 않는 무거운 입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것은 나름 감사한 일이지 않을까. 오늘 밤은 나만의 신에게 오랜만에 기도를 드리고 자야겠다. 그분은 엄마가 매일 묵주기도를 드리는 신과는 분명 다른 분일 것이다. 솔직히 그중에 누가 진짜 신인지, 그분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냥 나의 징징거림을 받아주심에 감사할 뿐이다.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보게 된 한 영상에서 ‘행복’이라는 감정은 ‘고마움’이라는 감정과 비례한다는 결과가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내가 행복했던 순간들엔 항상 고마운 사람들이 함께했더라. 수많은 사람들이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신을 믿고 의지하는 이유 중 하나도 고마워할 대상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유지하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다들 각자의 신이 있다면 그게 설령 자기만족일지라도 나름대로 잘 믿으며 살아가면 좋겠다. 대신 누구처럼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피해를 주진 말기로^^.

이전 03화 #02 사랑을 담는 펜던트 목걸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