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이혼하기 17.
타노스의 손가락은 튕겨졌다. 천지는 개벽을 했고, 나는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세상의 이치를 보다 깊이, 넓게, 많이 깨달아 현자라 칭송받는 이들이 다 같이 짠 듯 가정과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가정은, 인간이 뿌리를 내리는 땅과 같다. 단단히 밟고 꼿꼿이 서서 짱짱히 버티도록 해주는 곳이다. 진창에 선 나무는 비바람에 버틸 수 없을 뿐 아니라 맑은 날에도 제대로 서서 햇빛을 받으며 쉴 수도 없다. 진흙탕에 가지와 잎을 박고 고꾸라져 있을 테니까. 나는 이혼을 결심하고 진행하던 몇 개월 동안 그 진창을 몸소 경험했다. 나는 하늘 높이 솟아올라 가지가 무성한 거대하고 멋진 나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나무들이 자라는 방식을 따라 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따를 수 없었다. 내가 진창에 발을 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를 지지하고 신뢰하는 가족도, 내가 평안과 안식을 얻을 가정도 필요치 않다고 자신했지만, 결국 나는 친구에게 가족의 신뢰와 지지를 바라고 있었고, 직업적 성취를 통해 평안과 안식에 이르고자 했다. 어떤 인간에게 신뢰와 지지, 평안과 안식이 필요치 않다면, 그 이는 이미 인간이 아니리라. AI나 금수 정도로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사실 나도 그 모든 것들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것들을 '가족'과 '가정'이 아닌 다른 사람, 다른 것들로부터 얻어보려 애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나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그것들을 가족과 가정이 아니라 엉뚱한 데서 찾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피톤치드를 찾고 있는 격이었다. 번지수가 한참이나 잘못되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는 언제나 크나큰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알게 된 것'을 과연 내가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 재보았다. '가정을 지키는 것이 순리임을 마침내 알게 된 것'이 결코 '남편과 이전과는 다르게 잘 지낼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나는 지난 2년 간, 이혼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아이를 두고 이혼까지는 가지 않으려 최선의 노력을 했었다. 그럼에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이혼에 이른 것이었는데, 그런 내가 아무리 새롭게 '깨달은 것'이 생겼대도 그 지옥 같은 삶을 다시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는 것'이 달라진 것이지, '생겨먹은 것이' 달라진 것은 아니질 않은가. 깊은 고뇌가 시작되었다. 태생적으로 목표 지향성을 지닌 나의 머리는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해결책을 찾는 데 몰두했다. 어느 때보다 더 간절히 새벽 생각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새벽마다 일어나 가만히 앉아 생각이 풀을 뜯어먹도록 자유롭게 풀어놨다. 포동포동 살이 오른 너그러운 생각들이 내게 답을 주었다.
'너는 2년 동안 노력을 했다고 했는데, 어떤 노력을 했지? 참은 거? 그건 노력이 아니지. 참은 거지. 노력은 실질적인 것이라야 하지. 예를 들어 부부상담이라던가, 제대로 된, 정기적인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던가... 아, 싸우면서 하는 대화는 제외하고 말이야.'
놀라웠다. 나는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며 이혼을 참아왔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라는 것 중 실제로 손에 잡힐만한 일이 없었다. 그저 이혼하고 싶은 마음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려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참은 것 밖에는. 정말 남편과 잘 살아보고자 '노력'을 했다면 하다못해 절에 들어가 삼천배를 하던지, 교회 새벽기도회에 나가 백일기도라도 드려야 하는 것 아니었겠나. 이혼 위기의 부부들이 이혼 전에 꼭 거친다는 그 흔한 '부부상담'도 한 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간 한 번도 내가 가정을 지키기 위한 제대로 된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다시 제대로 된 노력을 해 볼 기회라도 있으니.
며칠 후 생각을 정리한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뭐든 할 수 있어?”
“??”
“아이랑 같이 살고 싶다며. 그럼 나랑 같이 살아야 하는 거잖아. 나랑 같이 살기 위해서 뭐든 할 수 있겠냐고.”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응, 뭐든지 할 거야. 해야지.”
나도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래 좋아. 분명히 뭐든지 다 한다고 했어. 그 말 한 거 잊지 마.”
“그러면?”
“우리 지금 소송 중이잖아. 소송은 그대로 놔둬. 변호사가 요청하는 거, 법원에서 내라는 거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제출해. 나도 그럴 거야. 단지 우리는 이 느려터진 법 절차를 이용해 우리만의 테스트 기간을 갖는 거야.”
남편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재차 물었다. 남편의 뇌에서는 결코 생성될 수 있을만한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다잡는다 해도, 예전처럼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살 수 있을 리가 없어. 우리가 잘 지내려고, 싸우지 않으려고 노력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어차피 결국 똑같이 다시 이혼하자고 돌아올게 뻔해. 하지만 이번엔 다른 노력을 해보는 거야.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우리가 우리 딴에는 각자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다고 하지만, 부부상담같이 기본적인 것도 해본 적이 없잖아. 일단 부부상담도 받고, 필요하다면 각자 개인적으로 심리 상담도 받을 수 있고. 필요하다면 종교의 힘도 빌려보자고. 그래도 끝내 안되면, 계속 소송 진행하는 거지.”
“그래 좋아.”
드디어 나의 얼토당토않은 제안에 수긍을 하게 된 남편이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눈 며칠 후 우리 셋은 테스트 삼아 다시 한 집에서 살아보기 시작했다.
내 가구 하나 없이, 편히 드러누워 책 볼 공간 하나 없이 부모님 댁에 빌붙어 살다 다시 '우리 집'으로 복귀한 나는 새삼 그 '우리 집'이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 집은 '나의 집'이었다. 내면에서 'Home, Sweet Home!'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반년만에 다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그 느낌은 내게 말할 수 없이 큰 만족감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친정 부모님이 더 이상 육아로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내 영혼에 평안을 안겨주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가 이 집에서 어떻게든 잘 살아나가 보기로 굳게 다짐하기에 충분했다.
다시 아빠와 함께 살게 된 아이는 매일같이 이른 새벽잠에서 깨어나는 즉시 '아빠'를 찾았다. 그리고 아빠를 확인하는 순간 형언할 수 없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장 놀라우면서도, 돌아보면 몹시도 가슴 아픈 변화는, 우리 셋이 함께 생활한 지 한 주, 두 주...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눈에 띄게, 아니 눈에 띄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도 확실히, 마치 다른 아이가 된 듯 나날이 밝고 명랑해졌다는 것이다. 나와 우리 부모님은 내가 친정에서 지내던 시기에 아이가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참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아이가 급속도로 밝아지고 심히 쾌활해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동안 내가 아이에게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던 것일까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우리 세 식구가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확연히 달라지는 아이의 모습과 표정, 성격을 보며 나의 엄마는
"세상에, 애 표정이 어쩜 이렇게 달라지니, 어떻게 이렇게 애가 밝고 명랑해지니..."
라고 연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고,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결핍이 채워졌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과, 결국은 깨어지지 않고 하나가 된 우리 가정에 감사했다.
4:30 am
나에게 새벽은 신비의 시간이다.
그렇게 소송을 진행하며 함께 지낸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던 어느 날, 나는 그날도 역시 새벽에 일어나 차를 마시다 생각에 잠겼다. 향기로운 차향기에 기분이 좋아진 살진 생각 하나가 내게 뜬금없는 말을 해왔다.
'그 만날 꾸벅꾸벅 조는 네 남편 말이야, 혹시 기면증이 아닐까?'
그야말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얘기였다. 내가 아는 기면증이란,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잠에 빠져들어 길에 쓰러진 채 잠을 자는 엄청나게 위험한 병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냥 만날 시도 때도 없이 꾸벅꾸벅 졸뿐이었다. 특히 내가 화를 낼 때면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기면증보다는 병든 닭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했다. 더 정확히는 화를 돋우는 재주가 있는 병든 닭. 그래도 새벽 생각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던 바, 나는 꼭두새벽에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기면증은 뇌의 수면-각성 주기를 조절하는 메커니즘의 이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만성 신경계 질환으로, 환자는 낮에 극심한 졸음을 경험하며, 수면과 관련된 다양한 비정상적 증상을 보인다고 했다. 내가 수집한 모든 검색 결과를 종합해 본 결과 놀랍게도 남편은 기면증의 진단 기준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나는 곧장 남편에게 기면증 검사를 권했다. 40년을 한결같이 꾸벅꾸벅 졸며 살아온 남편은 '기면증'이라는 용어의 등장에 나보다 더 황당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럼에도 나를 극도의 분노로 치닫게 하는 핵심 포인트가 부부싸움 때마다 선보이는 자신의 '졸기 신공'이라는 것을 뼈아프게 자각하고 있던 남편은 즉각 1박 2일에 걸친 수면다원검사를 받았고, 의사로부터 중증 기면증 판정을 받았다. 남편은
"의사가 하는 말이, 보통은 정확한 진단을 위해 추가 검사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내 경우는 뇌파만으로도 너무나 확실해서 추가 검사를 할 필요도 없대. 아주 심한 기면증이래."
라고 말하며 여느 때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이후 남편의 희귀병이 된 기면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던 나는, 기면증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 증세인 수면발작(Sleep Attack,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잠에 빠져드는 현상)과 탈력발작(Cataplexy, 갑작스러운 근육 긴장 상실로 몸이 축 처지는 현상)이 강한 감정(웃음, 놀람, 분노 등) 자극 시에 주로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다양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으로 설명되고 있었다. 결국 남편은 부부싸움 도중 느끼는 놀람, 분노, 스트레스 등과 같은 강한 감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매번 잠에 빠져들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그랬다. 내가 '왜 너라는 인간과 반드시 이혼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목청 높여 설명할 때마다 너무 졸린 나머지 눈꺼풀조차도 들기 버거워하며 무기력하게 그저 꾸벅꾸벅 졸던 것은, 그간 내가 확실히 믿었듯 나에 대한 무시나 우리의 관계에 대한 폄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알고 보니 남편의 심한 병증이던 것이었다. 남편이 나와 싸울 때마다 잠에 빠져드는 것에 대해 나는 남편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이기 때문이라 굳게 믿어왔지만, 알고 보니 그는 나와 싸울 때마다 극도로 강한 감정(그것이 무엇이든)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토록 빠짐없이 강한 수면발작 증세를 보여왔던 것이었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 뒤에 가려진 그의 내면은 사실상 큰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탈했다. 짧은 머리로 남편을 어설피 단정 짓고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나란 사람이었다.
남편이 1박 2일에 걸친 검사 후 중증 기면증 판정을 받아왔던 그날,
나는 로펌에 연락해 모든 소송 절차를 취하하고 법원에 변호사 사임서를 제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세 식구는 아주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