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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나라나 Jan 03. 2022

쌍가마와 E.T와 깐부

샤워를 하고 나와 얼굴에 크림을 바르며 신랑에게 전철 안에서 똑같은 교복을 입은 수많은 남자아이들 중 아들의 뒤통수, 특히 쌍가마를 보고 단번에 알아봤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신랑이 말했다.


"나도 쌍가마야."


내 아들이 아닌지라 유심히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정수리를 확인해보니 정말 쌍가마다.


"뭐야. 그럼 장가 두 번 가는 거야?"

"어. 한 번 더 남은 거지."

이런 썅.. 가마..


어젯밤 <마지막 이벤트>라는 유은실 작가님의 동화책을 읽는데 너무 슬퍼 혼났다.

책 곳곳은 유머가 가득하고 아이의 시선으로 쓴 것이라 그리 슬프지 않다. 

예를 들면 할아버지의 가운뎃손가락이 퇴행성 관절염으로 잘 구부러지지 않아 손 모양이 딱 '뻑큐'라는. (오늘 왜 자꾸 욕이..)

그럼에도 슬펐던 건 너무나 생생하게 할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놓아서이다.




할아버지는 일흔아홉, 얼굴은 여기저기 깊은 주름과 저승꽃이라는 검버섯이 뒤덮고 있고, 아무리 씻어도 지울 수 없는 입냄새, 몸 냄새 때문에 가족들은 힘들어한다. 몸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각질, 살비듬도 싫어한다. 하지만 노인정에 가면 여전히 어여쁜 할머니들에게 눈길이 가고, 잘 보이고 싶어서 몇 올 안 남은 머리도 정리한다. 검버섯을 없애는 피부 크림도 열 두 통째 바르고 있다. 본인이 인기가 없는 이유는 피부가 안 좋아서인 것 같다.

노년에 부인에게 이혼당한 채, 살갑지도 않은 아들 집에 얹혀살며 며느리에게 차마 팬티 빨래를 못 맡겨서 마지막까지 쭈그리고 숨어서 빠는 장면을 읽는데 애잔했다. 


아마 신랑도 사십 년 뒤엔 저런 모습까지는 아니어도 비슷하게 늙어가겠지. 책을 읽다가 덮고 신랑에게 물었다.


"우리가 그때까지 함께 살아있을까?"

"운 좋으면 살아있겠지."

"나 먼저 죽으면 어떡할래?"

"누나한테 갈 거야."

"누나도 이미 돌아가셨으면?"

"아 그럼 진짜 슬플 것 같다."

"뭐야. 나보다 누나가 없다니깐 더 슬퍼하는 것 같다."

"응 우린 깐부잖아. "

오징어 게임 보고 나서는 말끝마다 깐부다.미디어의 영향은 애나 어른이나 무섭다.


몸 만드는 게 꿈인 신랑은 지금 배가 남산만 한데 뚜지가 아빠의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거 아빠 옹당이야?"

" 뚜지야. 아빠가 진짜 복근 만들어 보여준다. 쫌만 기다려. 깜짝 놀랄걸."

"배가 더 나와서 깜짝 놀라는 거 아니야?"

"괜찮아. 우린 깐부잖아."

...이노무 깐부...

"내가 사실 군대에 있었을 때는 진짜 날씬하고 근육만 있었거든."

왜 멋진 모습이 안 그려지고 비쩍 말라비틀어진 멸치가 생각날까.

마른 체질인 신랑은 사실 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좋아했다. 얼굴에도 살이 찌고 팔다리도 제법 두꺼워졌다며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잇살은 죄다 한 군데로 모이기 시작했다. 원체 갸름한 얼굴엔 살이 붙지 않았고, 팔다리도 여전히 두꺼울 정도는 아니라서 그냥 E.T가 되었다.

그건 나도 뭐 할 말 없다.

좁은 공간을 스칠 때 서로의 배가 먼저 상대방의 몸에 닿으니 허그를 해도 설레는 게 아니라 그냥 이티끼리 배로 퉁 치고 인사하는 기분이다.


스킨 하나도 제대로 안 바르는 신랑의 얼굴을 매만졌다. 젊은 시절의 팽팽함은 어디로 가고 세월의 흔적들이 눈가 주름을 따라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오빠 얼굴 팩을 좀 해줘야겠구먼. "

"갑자기 왜 그래? 왜 잘해줘. 무섭게."

"우린 깐부잖아."


그리고 할 말이 있어. 나이 들면 내가 먼저 저세상으로 갈게. 뒤에 남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당신은 한 번 더 장가갈 수 있다잖아. 그때 피부가 좋아야 인기가 많대. 

이게 쌍가마 당신과 깐부인 나의 운명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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