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신랑이 갑자기 고기를 사 온다는 문자를 보냈다.
무슨 일이지? 늘 장은 내가 보기 때문에 갸우뚱했지만, 직장 동료가 저렴한 로컬 정육점을 알려줬나 보다 싶어 더는 묻지 않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신랑의 손엔 마트에서 산 게 확실히 아닌 듯 싱가포르 시장인 웻마켓에서 볼 수 있는 다홍색 비닐봉지가 들려있었고 그 안에는 부위를 알 수 없는 소고기 두 팩이 담겨 있었다.
가격을 보니 현지 마트보다는 조금 저렴했다. 그렇다면 입구에서부터 환하게 웃으며 봉지를 흔들어댔을 텐데 그의 얼굴이 어두웠다.
"오빠 싸게 잘 샀네. 근데 왜 이렇게 심각해."
"저기.. 이거 사러 처음 가보는 곳 갔다가 주차장 기둥을 못 보고 차 긁었다.. 아. 왜 하필 거기에 기둥이.."
참고로 우리 차는 산 지 일 년밖에 안 된 새 차였고, 그 일 년 동안 신랑은 자신의 애마인 새 차를 부인보다 더 아껴서 나에게 차 키를 잘 넘기지도 않았다..
'아이고.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냥 하던 대로 할 것이지..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사고를 쳐..'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잔소리를 참았지만 내 잿빛 얼굴과 눈빛은 이미 그에게 마음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신랑이 차를 안 긁었으면,
"와. 역시 맨날 사던 것만 사면 안 되고 새로운 걸 시도해봐야 해. 어머 너무 싸게 잘 샀다." 했겠지.
분명 '새로운 시도'와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은 처음 시작이 설렘과 도전과 용기라는 똑같은 마음인데 결과에 따라 칭찬 아니면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맛있게 먹자며 고기를 구웠는데 세상에, 고기 맛에 깜짝 놀랐다. 다시는 안 사 먹을 누린내가 진동했다.
검은 밤처럼 어두워진 신랑의 얼굴에 순간 한 줄기 반짝이는 희망이 비쳤다.
"괜찮아."
"뭐가? "
" 나 이번에 차 보험 들 때 자차도 들었고, 또 사고가 나도 한 번은 봐줘서 보험료 안 오르는 그걸로 해놨어."
얼굴에 드리웠던 밤의 장막이 서서히 거치며
"아. 보험들 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살짝 고민했는데 나 너무 잘한 거 같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나에게..'로 시작했다가 로 나름 이 사태를 긍정적으로 마무리하기로 한 사람의 기쁜 눈과 마주쳤다.
"진짜 잘했네..."
좀 전에 오미크론의 거센 물결 속에서 아직까지 무사히 버티고 계신 한국의 부모님과 통화를 했다.
"그래도.. 오미크론 걸리면 십만 원 준다더라. "
엄마의 무심한 듯 덧붙이는 이야기 속에 혹시 걸리더라도 좋은 점은 있어.라는 뉘앙스를 느꼈다.
나쁜 상황이 찾아와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 긍정적인 하나의 무언가를 붙잡고 살아내려고 버텨오신 칠십 년 넘는 세월의 비법일 것이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국내에서 겪지 못할 힘든 일들이 더 자주 생겼다. 그럼에도 그 시기들을 잘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가족이 긍정적이어서가 아니라, 긍정적이지 않으면 그 상황을 버텨낼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최대한 좋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버텨온 것 같다.
이제 마흔을 넘어 인생의 후반전으로 갈수록 더 빈도수가 잦게 빵빵 터지는 사건 사고의 지뢰밭에서 긍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사고처리를 하고 수습하며 상처를 감싸는 데 점점 익숙해지는 듯하다.
아픈 건 나이 들어도 똑같이 쓰리고 아프다. 그렇다고 손 놓고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주렁주렁 달린 가족들이 있으니, 주섬주섬 툭툭 털고 일어난다. 상처를 움켜쥐고 둘둘 동여 메고 일어난다.
그리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괜찮아."
"이만해서 다행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