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를 졸업하고 현직 제조업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는 남들과 조금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직무 전환을 자주 했다는 점 입니다. 그만큼 하기 싫고 안 맞는 것은 못 참는 성격인가 봅니다. 그래서 각 직무별로 필요한 능력에 대해서는 한 가지 직무만 수행했던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파악하고 있는 편입니다.
입사 후 처음에는 공정기술 엔지니어를 했습니다. 24시간 돌아가는 산업 인지라 교대/휴일 근무를 필수로 했습니다. 20대 한창 젊은 나이 때는 남들과 다른 시간에 출퇴근을 한다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운 좋게도 기회를 통해 개발 엔지니어로 직무를 전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5년 정도 해보니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생산관리직으로 다시 직무를 전환했습니다. 결국은 '탈 엔지니어'를 한 것인데, 저는 이것이 저에게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맞는 옷이 있는 것이고, 저는 엔지니어와는 맞지 않았던 것이거든요.
그럼 엔지니어가 갖춰야 할 능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문제해결력'을 최우선으로 꼽고 싶습니다. 제품 개발 상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난제들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신속하게 해결해내는 것이 엔지니어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생각보다 다양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학/석/박사를 거치면서 쌓아온 물리적인 지식은 기본입니다. 당연히 급변하는 최신 기술 트렌드는 항상 숙지를 해놓아야 겠지요. 문제 해결을 위한 의견이 사람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나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피력하여 주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표현력도 필요합니다. 유관 부서들과의 이해 관계 같은 회사 시스템 내의 제약 사항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일정 수준의 정치력과 섬세함, 잔머리(?)도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아이디어대로 사람들이 열심히 움직일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리더쉽도 필요합니다. 일견 첨단을 달릴 것 같은 엔지니어링 작업들은 수많은 노가다를 필요로 합니다. 어떠한 노가다라도 감내할 수 있는 인내심과 체력도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
따라서 엔지니어링을 잘한다, 개발 난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학창시절에 수학 좀 풀어봤다를 넘어서는, 더 골치 아프고 복잡한 영역입니다. 제품이 고도화 될 수록 나서서 할 엄두가 나지 않는 일들이 태반이거든요. 내가 안하면 누군가가 나서서 해주겠지...괜히 나섰다가 실패해서 나중에 책임을 떠 안으면 어떡하나...그렇기 때문에 개발 업무에 대한 '진심'과 '집요함'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Nerd'형 수재들이 필요합니다. 대기업 브이로그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외모도 좀 되고 퇴근 후에는 필라테스와 자기 공부도 좀 하면서 휴일에는 문화생활을 하거나 해외여행 가는 그런 사람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들...자기들만 아는 단어로 개그치면서 남들 다 퇴근했을 때 박탈감을 느끼기보다 실험실에 짱박혀서 이것저것 테스트하며 희열을 느끼면서 성격 이상해진 사람들...새로운 기기가 나오면 '와 신기하네'가 아니라 '도대체 어떤 원리이지...분해해 보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그런 사람들이 항상 하드캐리를 하고 그렇게 회사가 버텨왔습니다. 저는 그런 괴물들과 태생부터가 다른 사람이라 생각해서 엔지니어를 그만두었습니다.
문제는 수출 제조업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의 제조업 현장에 저런 수재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당연히 보상이 적기 때문이겠지요. 최근 유튜브에서 연봉을 공개하여 화제가 된 미용GP의 말이 사실이라면, 젊은 미용GP가 수출 대기업 하위 임원보다 봉급, 워라밸, 직업 안정성 면에서 훨씬 낫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는 뻔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타고난 'Nerd'라도 이 정도 격차는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 나라는 사농공상의 문화가 아직 남아 있어서인지, 자기 소개할 때 '의사'와 '공장 직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천지 차이이죠. 제조업으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정말 아이러니한 이야기 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저출산으로 인한 인력풀 감소도 수출 대기업들에게는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AI가 다 해결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보기에는, 세계 모든 경쟁 회사들도 통용되는 얘기일 것이며 결국 제품 퀄리티의 마지막 차이는 유능한 인재들이 만들어 낼 것입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회사도 매년 수 많은 박사급 인력을 채용하고 있지만 만성적인 사람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실무를 할 사람도, 난제를 풀어갈 슈퍼 에이스들 모두 부족합니다. 과거 개발도상국 시절처럼 가성비 좋게 제품을 공급하는 시절이라면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앞으로 애플/퀄컴/TSMC와, 현대자동차는 테슬라/BYD/도요타 같은 세계의 수재들로 가득찬 괴물 회사들과 계속 경쟁을 해야 합니다.
저 같은 탈 엔지니어를 한 사람에게는 일반 회사원 월급을 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수재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보상을 해주어야 하며, 국가에서는 그런 수재들의 이탈을 유발하는 시스템 적인 문제가 있다면 해결을 해야 합니다. 최소한 제조업 외 국가가 먹고살 또 다른 산업군을 발굴하기 전 까지는 그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