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o estas? 2-1. 무늬만 휴가

Chapter 2-1. 무늬만 휴가

by 이상

모든 것을 다 잊고, 출퇴근도, 노트북도, 이메일도 다 잊어도 되는 휴가는 꿀맛이다.


휴대폰까지 꺼 버리고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개인적인 연락도 있고 급한 업무 연락이 올 수도 있어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또 어쩔 수 없이 켜게 된다. 현대 사회의 족쇄.


트랜싯 (transit, 중간 도착지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 할 때 라운지를 찾을 때도 휴대폰 앱이나 포탈에 접속해서 찾아야 한다.


휴가 잘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현지 책임자 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현지 domestic (국내)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책임자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현지 카운트 파트 ㄱ 씨가 이러이러한 요청이 왔는데 이렇게 저렇게 대응하면 될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나? 현지 책임자가 알아서 하는 거지. 나 없을 땐 어떻게 했나? 휴가 간다고 나온 사람에게 이렇게 전화할 사안인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휴가 스타트에 깜빡이 없어 들이미는 전화에 부정적인 감정이 불쑥 솟아올랐지만,


그래, 내가 필요하니까 이렇게 휴가 때까지 찾아 주고 하는 거 아니겠어.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마음을 다잡고,

제 생각에는 어러 저러한데, 이렇게 처리하면 될 것 같은데요. 하고,


마지막에 제가 레터 써서 보내드릴까요? 하고 과도한 친절을 내비쳤다.


아니 뭐 휴가까지 간 사람에게 그런 일까지 시키나, 여기서 알아서 할게. 푹 쉬고 와라는 아름다운 티키타카를 기대했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고마워, 역시 C 과장이야.”


내가 왜 그랬지?

허허허, 헛웃음과 함께 그렇게 현지 비행기를 타는 시간에 노트북을 켜고 레터를 작성하는데 콧노래가 나왔다. 내가 여기서 미쳐가는구나 ㅎㅎ


일이 많아지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흥얼거리던, 퇴직하신 그 부장님이 생각난다. 나도 그렇게 되어가나.


내리자마자 와이파이를 잡아 아웃룩으로 메일을 보내드렸다.


그리고 international (국제) 항공에서 security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자 이제야 진짜 휴가 가는 기분이 나기 시작했다.


라운지에 기다리는데 빨리 비행기 타고 싶은 조바심이 나고, 한국 가면 만나고 싶은 사람,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을 기록해둔 것을 꺼내서 날짜 별로 계획을 짜고 보완했다.


해외에서 근무하다 한국에 들어오면 마치 군대에서 휴가 나오는 기분이 든다. 첫 휴가는 이등병 때 나오는 백일 휴가와 비슷한 것 같다. 달력에 날짜 하나씩 X 표 쳐가며, 휴가 계획 짜면서 설레는 마음.


공항에 여유 있게 도착해서 라운지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앉아서 여유를 부리며 과일과 맥주를 한잔 하다 살짝 잠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깨웠다. 라운지 직원이었다. 어이쿠 비행기 탈 시간이 그새 다 되었나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남아 있었고 이 친구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내 부치는 짐에 문제가 있어서 지금 그쪽으로 가봐야 한다는 거였다.


하, 이거 왜 이러지 참.


비행기 시간은 다가오고, 가지 않으면 짐에 문제 생겨서 최악의 경우 짐이 비행기에 실리지 않을 수 있어 (예전에 직접 당해봤다.) 바로 잠을 깨고 날아갔다.


계속 찾았는데 왜 이제 오냐며 와인을 왜 이렇게 가져가냐, 커피도 가져가는데 밀수하는 거냐 하고, 한국 약을 보며 이거 마약 아니냐 이상한 소리를 계속하길래, 다 선물 받은 거고 이건 소화제다. 지금 까서 너하고 나하고 반씩 먹어볼까?


다 여기 버리고 갈까? 그래서 문제없으면 이 약이 마약 아니면 니들이 책임질래? 까지 퍼붓고,

너희들 돈 필요해서 이러냐 하려다 멈췄다.


나 관광객 아니고 여기 오래 살았고 이런 거 문제없는 거 아니까 빨리 짐 부쳐줘라, 비행기 시간 다 되어간다 부탁한다고 하니 그제야 다음부턴 조심하라고 한마디 한 뒤, 비행기에 실어주는 것 같았다.


뭘 조심하라는 거냐며 붙을려다가 귀찮기도 하고 목적은 달성되었으니 Gracias (고맙다)하고 말았다.


아, 이거 왜 이러지? 휴가 기간에 마가 끼었나.


좋은 생각으로 전환해보려 했지만 휴가 기간에 망쳐진 기분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미국 esta도(전자여행허가) 기간이 남아 있고, 미국에 여러 차례 와봐서 처음 왔을 때와 같은 긴장감은 없었다. 다만, 밤 비행기를 타고 와서 아침에 깨자마자 immigration을 (이미그레이션, 출입국 절차) 길게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게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운지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나니 그래도 한결 나았다.


평일 낮의 공항 라운지. 은은한 음악이 흐르고 사람은 없고, TV를 보고, 신문이나 읽으며 음식을 먹고 맥주를 마시면서 만끽하는 여유.


내가 써드린 레터는 잘 검토하고 보내고 처리를 했나.


이 죽일 놈의 일 중독. 해외에선 친구도 없고 갈 곳도 별로 없다 보니 계속 일만 생각하게 된다. 회사 사람들과 계속 붙어 있다 보니 화제도 일 관련된 대화가 대부분이어서 일에서 떠나지를 못한다.


책임감에 노트북을 열고 아웃룩에 연결하자 메일이 쏟아져 들어왔다. C 과장님, 한국 잘 도착하셨습니까로 시작하는 업무 협조 요청 메일.


아이고, 이거 쉬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정말.


다행히 메일은 공유 목적의 메일이 많았고, 급하게 보고 처리할 것들은 적었다. 진짜 급했으면 카톡, 문자 날아오고, 전화까지 왔겠지.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는지 그런 건들은 없어 급하게 회신할 건들만 회신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괜히 켰어, 괜히 켜.


늦은 후회는 새콤한 와인 한잔으로 날려버리고, 대기 시간이 아직 남아 있어 잠을 청했다. 다행히 이곳에선 아무도 날 괴롭히지 않았다.


괴롭히지 않아서 불안했던지 탑승구에 도착해서 프런트 직원에게 비행기 표에 붙은 짐 표를 보여주며 한국 가는 비행기에 잘 실렸는지 확인했다.


점점 한국 사람들이 눈에 많이 보여 실감이 났다. 아 이 비행기만 타면 나 진짜 한국 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