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여는 어떻게 여성 연대로 변화하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좋은' 드라마 한 편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동백꽃 필 무렵>을 고를 것이다. 사실 '좋은' 드라마는 '재밌는' 드라마 그리고 '화제성' 있는 드라마와 완전히 같은 개념이 아니다. 물론 이들 사이에 교집합이 꽤 넓을 수 있으나 이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화제성 있는 드라마라고 해서 좋은 드라마는 아니며, 좋은 드라마라고 해서 재미와 화제성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백꽃 필 무렵>은 좋은 드라마이다. 그러나 동시에 재미있고 화제성이 있다. 그럼에도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를 수식하는 한 단어를 골라야만 한다면 내 답은 '좋은' 드라마일 것 같다.
좋은 드라마란 무엇인가? 여러 요건이 있겠지만 먼저 주제의식이 있어야 한다. 사실 <동백꽃 필 무렵>의 주제의식은 이를 보는 사람에 따라 상당히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본, 이 드라마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뚜렷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찾은 주제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선의 평범성'이다. 몇 달 전, <유 퀴즈 온더 블록>에서 이수정 교수님이 관련 내용을 짧게 언급하셨는데, 본 드라마의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까불이'를 잡는 것에 비단 경찰뿐 아닌 옹산 시민 모두가 관심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이에 대해 혹자는 동백꽃 필 무렵이 지나치게 판타지답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이라는 것은 사실 큰 것이 아니다. 꼭 범죄자를 함께 잡고 검거해야만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n 번 방 사태에 대해, 많은 대중이 분노하고 이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조주빈은 포토라인에 섰고, 우리의 분노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선의 평범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잘못된 것에 응당 분노할 줄 알고, 피해자의 보호를 위해 관심 가지는, 이것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선이 될 수 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도 이러한 선의 평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주제는 바로 '여성의 삶' 이다. 처음에 이 드라마를 보며, 참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옹산에 처음 발을 들인 동백이와 직업여성 향미, 그리고 그들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옹산 여성들의 모습은 일명 '여적여' 구도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보다 보면 옹산 여성들의 관계는 '여적여' 관계보다는 '연대'에 가깝다는 느낌이 지속해서 든다. 그 이유가 참 궁금했다. 임상춘 작가가 직업여성의 서사를 내 건 이유도, 그리고 이를 경계하는 옹산 여성들의 모습을 그리는 이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습에서 필자가 알지 못할 페미니즘적 요소를 느끼고 있는 이유도, 모두 참 미묘하고 정의할 수 없었다. 여성 혐오에 대한 직접적인 '미러링'을 표방하는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와 비교해보았을 때에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보물과 같은 글 한 편을 발견했다. 임수연의 글 “<동백꽃 필 무렵>의 복합장르 전략이 의미하는 것” 이다.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보수적인 소재는 어떻게 진보적인 드라마가 되었을까?” 작은 시골 마을로 이사 온 미모의 여성 동백의 등장에 남성들은 혹하고 여성들은 경계한다. 보수적인, 전형적인 ‘여적여’ 구도이다. 그러나 미혼모 동백에 성희롱을 일삼는 동네 남성들의 모습에 분노하는 동백의 아들 필구의 모습은 미소지니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규명한다. 성희롱을 당해온 동백이 치부책을 들고 나서는 순간, 동백에게 묘한 연민과 관심을 보이는 동네 여성의 모습에서는 그들 역시 동백과 공통분모를 지닌 여성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동백꽃 필 무렵>의 서사구조를 임수연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동백꽃 필 무렵>의 ‘오해를 받다가 이를 뒤집는’ 서사구조는 양측을 모두 포섭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플롯이 단순한 ‘여성의 적은 여성’이나 ‘여성 연대’ 구도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보수적인 현실에 가닿는 설명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동백이 자신의 남편과 바람을 피웠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자영은 오해를 푼 후 무료 변호를 자처하고 술 한잔하고 싶다며 술집도 찾아온다. 수년간 성희롱을 당한 동백이 고소를 결심한 후 옹산 여자들은 동백에게 은근한 호감을 느끼고 소문의 힘으로 가해자의 민심을 박살 낸다. 누가 어떤 옷을 입고 신발을 새로 샀는지, 살이 빠졌는지 쪘는지 끊임없이 서로를 관찰하는 여성들에게 ‘시샘’과 ‘협력’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뒤집힐 수 있다.”
오해를 의도하는 드라마, 처음 이 드라마를 보며 '여적여' 구도를 발견한 나는 오해에 완전히 걸려들었다. 작가의 의도가 적중한 것이다. 극이 진행되며 이 드라마가 오히려 그 완전 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그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지 못했던 이유는 오해를 의도하는 이 드라마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직접적인 '미러링'을 표방하는 일부 드라마들과 직접적인 대비를 이룬다. 위에서 살짝 언급했던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호스트 바’에서 시간을 보내는 다경의 모습은 마치 누아르의 한 장면에서 등장인물의 성별만을 바꾼듯한 느낌을 준다. 정장을 입은 여성 캐릭터들은 높은 성과를 내며 자기 일을 해나가는 일명 ‘걸크러쉬’ 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즉 미소지니적 편견을 완전히 뒤집으며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임수연이 글에서 지적하듯, 주체적 여성상을 단지 꼿꼿한 강인함으로 묘사하는 것은 트라우마를 단순화하는 우로 이어질 수 있다. 임상춘의 세계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결코 검블유의 그들처럼 멋지지도, 쿨하지도 않다. 처절하고, 찌질하고, 촌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방법대로 삶을 개척해나가며, 임상춘은 따듯한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조연에 불과한 직업여성 향미를 위해 한 회차를 모조리 할애할 용기가 있는 그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멋있지 않아도, 쿨하지 않아도, 모든 여성의 삶에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지극히 단순하고, 전형적이고, 보수적이기 까지 한 소재에서 시작해 오해를 의도한 후 이를 뒤집는 <동백꽃 필 무렵>의 서서 구조는 시청자를 넓게 포섭한다. 젠더 이슈를 갈등의 범주로 포섭하는 게 아니라 삶의 한 범주로 포섭한다. 최근 한국에서 가장 날카롭고 예민한 이 주제에 대해, 그는 ‘휴머니즘’이라는 답변을 제시하는 것이다.
<동백꽃 필 무렵>은 결코 아름답기만 한 여주인공의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처절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주변 모든 여성과 그가 살아가는 모진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너무나도 특별할 것이 없어 어쩌면 비참하기까지 한, 이 주제에서 임상춘은 가장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특별하고 가치 있으며,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한 이러한 상식마저 통하지 않는 오늘날이다. 나와의 다름에서 오는 혐오와 증오, 편견이 도리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혹자는 휴머니즘이라는 ‘동백꽃 필 무렵’이 제시하는 답변에서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많은 시청자부터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시청자와의 공감대 형성에 성공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에서, 증오와 사랑이 순식간에 뒤집혀 지는 것을 목격하며 위안을 얻었고, 다양한 인생의 모습들이 당차게 자신의 가치를 실현시켜 나가는 것을 목격하며 만족을 얻었다. 자극적인 소재들이 인기를 얻는 요즘, <동백꽃 필 무렵>은 현대인들의 결여에 따뜻한 위로를 제공하는, 그런 드라마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