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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의 세계

깔깔 / 반려종의 시선 2장. 아픔과 돌봄에 대하여

   살아있다는 건 소리를 내고 움직인다는 뜻이다. 사람은 울음이라는 소리로 첫 존재감을 나타낸다. 울음이 언어가 되고 노래가 되는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쨌든 첫 출발은 ‘으앙’이다. 게다가 세상에 편입되기 위해 누워서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스스로 걷고 춤추며 이동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누운 채로도 바쁜 아기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살기 위한 언어가 모여 역사가 되는 건 태초의 울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몸을 깨우고 있었다. 잠과 깨어남은 매일 경험할 수 있는 죽음과 삶의 메타포. 앞마당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맞은편 집 아침 뉴스가 조합이 맞지 않는 소스처럼 얹혀 있었다. 내 몸은 여전히 죽은 듯 꼼짝할 수 없었지만 귀는 열려 있어 자연의 소리도 인간의 소리도 다 들을 수 있었다. 임종 때 가장 늦게 닫히는 감각기관은 귀다. 더 이상 듣지 못할, 영원히 간직해야 할 ‘사랑해’라는 그 말을 한 번이라도 더 들으라는 신의 섭리는 그래서 타당하다.


   어느 날이었다.


   ‘쿵’


   순식간에 내 마음에도 ‘쿵’의 굉음이 지나갔다. 누군가 하늘을 날다가 창문에 부딪힌 것이다. 거실 창문이었다.


   “당신도 쿵하는 소리를 들었어?”

   “그거 새가 부딪힌 거야.”


   나는 경악한다. 2층짜리 단독주택인 우리 집이 누군가에게 위험건축물이라는 사실에. 인간으로 치면 뇌진탕급 충격이다.


   “이리 와 봐.”


   남편이 창문 앞으로 나를 이끈다.


   “여기 숫자 3 같은 자국은 날개도 함께 부딪힌 거야.”


   창문 곳곳에 ‘쿵’의 흔적이 여럿 있다. 하루에 2만 마리, 연간 800만 마리의 새들이 유리창 때문에 죽는다는데. 새의 안위가 우려되었다. 나는 마당으로 나가서 거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거실 창문은 영락없는 가상세계다. 하늘의 구름이며 전봇대며 전봇대의 전깃줄까지 모조리 거울처럼 투사하고 비추고 반사했다. 새들이 가상세계를 인지하려면 아마도 수만 번의 진화를 거듭해야 할 것이다.


   ‘색색깔깔 색깔여행’이란 제목으로 그림책 수업을 진행했었다.


   “짐에게는 아이들 수업용으로 코팅한 나뭇잎이 있사옵니다.”

   “그럼, 그걸로 당장 조치해.”


   마음의 소리에 따라 즉시 몸을 움적거렸다. 창문이 금세 알록달록 해졌다. 아이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도 새록새록 피어났다. 가을임에도 이상하게도 초록을 애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단풍 잎사귀 한 장 안에서 여러 색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한여름 싱그런 초록의 잎사귀 안에서도 단풍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고 그 너머를 보는 눈은 아름다울 거라고 말하면서.


   한 아이가 자기 몸 안에 핑크가 있다고 했다. 깜짝 놀라 그곳이 어디냐고 묻자 ‘폐’라고 답해서 함께 웃었다. 그 아이의 핑크 폐 속에서 들락거리는 들숨과 날숨을 나도 함께 마셨다.


   거실 창문에 ‘쿵’이 할퀸 후의 정적과 흔적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거리를 걸으며 거리의 빌딩 유리는 모조리 관찰했다. 배려 없는 창문을 만나면 여지없이 쿵쿵거렸다. 남편이 창문을 보더니 대뜸 촌스럽다고 난리다.


   “새소리에 아침에 눈을 뜨고 싶어?”

   “응.”

   “그럼, 촌스러움쯤 참아야지.”


   친정 엄마는 시각장애인이다. 시각장애인이 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장애인 등록을 하지 않았다. 장애인 등록카드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가 최근에 장애인 등록을 했다. 엄마의 나머지 한쪽 눈을 지켜야 해서 일산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아마도 중독자 치료센터 앞쯤이었을 것이다. 길가에 누워 파르르 몸을 떠는 참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한쪽 눈으로도 엄마는 내가 보지 못한 불쌍한 참새를 기어코 발견해 낸 것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두 손에 참새를 받아 든 엄마.


   “새들의 시력이 얼마나 좋은데? 높이 떠 있으면서 땅 위의 벌레를 볼 수도 있는데 도대체 왜 길가에 누워있는 거니?”


   몇 번인가 날아가도록 허공에 새를 놓아주었다. 새의 무게만큼이나 가벼운 엄마의 팔이 새처럼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삶이란 중력을 거스르며 날기 위해 버둥거리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생의 의지가 꺾여버린 새는 중력에 순응하며 아래로 꺼져갔다.


   중독센터에서 쏟아져 나온 병원복을 입은 환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워댔다. 아까 그 참새처럼 보이는 일은 어쩐 일일까? 담배연기만이 중력을 벗어나 장례식장 향처럼 하늘로 흩어졌다.


   12년 동안 시골에서의 삶은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 학원 하나 없는 곳에서 자연을 흠뻑 느끼며 자라났다. 아들은 그 영향인지 시골의 삶을 선택했다. 인구 6만 명 남짓 되는 가평군의 공직자로 근무하는 앳된 성인은 그래서 좀 고달프다.


   “시골 도로포장이나 확장에 있어서 근처에 계곡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도로 길이가 1km가 넘으니까요. 계곡에는 교량이나 석축이나 옹벽이 있고, 공사를 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시 지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럴 때마다 새 자재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구요. 제가 관리 감독해야 하는 공사가 작게는 몇천만 원에서 수십억이나 되는 공사도 있어요. 전봇대를 옮길까 말까? 가로등을 어디에 설치할까? 버스정류장은 어디로 옮기지? 마을주민들에게 공사개요 공청회를 열고 인접한 땅이 국가에 수용되는 분쟁도 해결해야 해요.”


   이어서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사가 시작되죠. 감독관 인수인계를 할 때 물어봤어요. “혹시 물고기 생각해 보셨어요?” 그분이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뭔 물고기요?”하고 되물었어요. “물고기 입장도 있는데 물고기가 아파하지 않을까요?””


   저쪽 세계에서 느닷없이 ‘쿵’이 날아들었다.


   “계곡은 물고기들이 숨 쉬고 자고 먹고 알을 낳는 곳이잖아요. 새 자재는 독성물질이 있고 그럼 물고기가 살기 힘들어져요. 그분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저 실수 없이 빨리 개설하는 것에만 급급하죠. 사실 환경영향평가도 하긴 해요. 하지만 물고기가 죽는 것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죠. 단지 흙이 유실될 것을 방지한다거나 폭우가 쏟아졌을 경우에 대비하는 정도예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저뿐인 거 같아요.”


   옳소! 옳소! 종(種) 너머 저쪽에서 동조하는 ‘쿵쿵’하는 발 장단 같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물고기를 ‘반짝이는 비늘로 된 실마리들’이라고 표현했다. 비늘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아들은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마치 반짝이는 모든 실마리들의 대변자인 것처럼.


   “엄마, 세상이 바뀔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생각해 보세요. ‘물고기가 아파할 것 같아서 하천에 말뚝을 박는 대신 당신 땅 위에 공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땅을 국가에 내놓으시죠?’ 이런 설득을 과연 누가 받아들일까요? 저는 어렸을 때 뛰어놀던 산이 민둥산이 되는 걸 보고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어른들은 나무를 베어낼까? 그런데 제가 공사를 지시하며 나무를 과감하게 베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마음이 아파요. 골프 같은 운동은 저는 정말로 할 수가 없어요. (그건 나도 그렇다.) 사람들은 나처럼 예민하지 않아요. 바로 눈앞의 것만 봐요.”


   나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직장, 아니 사회에 부적응하는 청년으로 키워낸 것은 아닌지 잠시 어질했다. 예민한 물고기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예민한 아들이 대신 아픔을 겪고 있고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나도 먹먹한 통증을 느꼈다. 아들은 현재 공황장애 약을 먹으며 현장을 지키고 있다. 자연과 생명을 지키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파괴해야만 하는 자기모순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아들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어떤 날, 아들은 이런 말도 했다.


   “도로를 건설한다는 건 인간에겐 참으로 편리한 일이에요.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편리하게 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동물은 삶의 터전을 잃는 일이에요.”


   ‘어느 날 그 길 위에서’라는 황윤 감독의 오래된 다큐멘터리 영화가 생각났다. 바로 몇 분 전까지 인간처럼 붉고 뜨거운 피를 가졌던 하나의 생명이 걸레처럼 나뒹굴고 있다. 그것은 건너편 숲으로 가고 싶었던 토끼였고, 건너편 옹달샘으로 가서 물을 마시고 싶었던 고라니 가족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감독은 영화를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사고를 당하기 직전 무엇을 하려고 했었고, 그들에게 어떤 욕구가 있었으며, 그들이 인간들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될 때 무엇을 느꼈을까, 그들에게 자동차라는 물건은 어떻게 보일까 등등을 상상해 보았다고 말이다.


   엄마의 근심 어린 표정을 눈치챘는지 아들이 생태통로라는 조커카드를 성급히 꺼내든다.


   “생태통로라는 것을 만들기는 해요. 도로나 댐의 건설로 야생동물 서식지가 절단되는 걸 막기 위해 야생동물이 지나는 길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것이죠. 하지만 야생동물이 그걸 잘 알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새들은 좀 더 자유롭겠구나.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으니….”

   “맞아요. 하지만 육지에 사는 동물들은 그냥 길을 건널 수밖에 없어요. 사람은 신호등을 볼 수 있지만 동물은 신호등을 보지도 못하는데….”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이동이 필수적이다. 번식하기 위해, 분만하기 위해, 사냥을 통해 먹이를 구하기 위해. 행동반경이 가장 좁은 축에 속하는 고라니조차도 매일 도로를 건너야 한다. ‘너희들 싸돌아다니지 말고 산에만 가만히 있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종종 출근길에서 도로가 빨갛게 물든 것을 자주 목격했었다. 퇴근길엔 그 자리가 말끔하게 치워져 있지만 은폐된 빨강은 또 어디선가 출몰할 것이었다. 남편은 초보 운전자인 나에게 항상 이런 당부를 했다.


   “도로에서 고라니를 만나면 멈추지 말고 그냥 달려. 머뭇거리다가 네가 죽어.”


   다행인지 12년의 시골 삶에서 밤길에 고라니를 만난 적은 없었다. 혹시 고라니를 만났더라면 엑셀레이터를 밟을 수 있었을까? 별처럼 밝게 빛나는 두 눈을 보고도?


   도시에서 몰려드는 아이들 때문에 애꿎게도 오래된 은행나무를 베어냈었다.


   “조현초등학교 다닐 때 은행나무를 베어내고 체육관을 세웠던 일 기억나니? 모두가 모여 은행나무에게 제사를 지냈었잖아.”


   “아. 그럼 저도 물고기와 동물들한테 속으로 작은 제사라도 지내야겠어요.”


   아, 이 아이는 도대체 어느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엄마. 저는 아마도 물고기(자연)의 대변자가 되는 것이 제 인생 과업인 것 같아요.”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자의 삶은 아프다. ‘악’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생명을 대신해서.


   어디선가 ‘쿵’ 소리가 들리는지 기웃거리며 자신을 활짝 열어젖힌 사람들. 자멸할지, 소멸할지, 파멸할지, 알 수 없는 그 길 한가운데서 사라진 생명 대신 우는 사람들. 같은 생각을 품은 동지들이 ‘쿵쿵’ 하고 달려올수록 그 세계의 지평은 넓어질 것이다. 태초의 울음이 빚어낸 ‘쿵’ 속의 ‘아픔’과 ‘사랑’ 그리고 ‘연대’를 복용하며 살아질 것이다. 더 자주 ‘쿵’을 들을수록, 느낄수록, 마침내 ‘쿵’을 저글링 할수록 역사는 새로워질 것이다. 소리 너머의 세계에 ‘사랑’이라는 음파를 송출하는 반려종의 반려인들이 이 세계 안에 있다. 지구 행성은 ‘쿵’이 지나간 그 자리에서 울음이 꽃으로 피어날 때 수호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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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깔


쓰고 죽으려는 사람동물.

어린이책 문화운동가.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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