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랑의 힘

하리타 / 반려종의 시선 2장. 아픔과 돌봄에 대하여

   우울이 마치 독한 감기 기운처럼 온몸에 퍼져 버릴 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사랑이 멈춰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면 내 혈관을 타고 쉼 없이 흘러다니던 어떤 힘, 사랑을 주는 힘과 받는 힘을 전부 잃은 채 몇날이고 몇달이고 버텨야한다. 누룽지를 두고 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런 상태로 지내던 어느 한 때였다.


   겨울의 초입. 새로 이사 온 도시. 모든 것이 내게 무뚝뚝하게 느껴졌던 그 구 동독 도시에는 폐허가 곳곳에 널려있었다. 자본의 우악스런 손아귀에 붙잡힌 것이 아니라 스스로 스러지고 허물어진 오래된 건물들, 그리고 그 안에 숨어든 쓰레기 더미나 집 없는 사람들을 매일 산책길마다 만날 수 있었다. 그게 싫지는 않았다. 차갑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그저 묵직하게 마음을 눌러주었다. 하지만 그런 풍경에 서서히 스며드는 생활은 아무래도 내 안에 쓸쓸함을 배가시켰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약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이리저리 조합하기로 했고, 일기장을 처분한다든가, 각종 고지서를 해결해 둔다든가 하는 주변 정리는 따로 안 하기로 했다. 누룽지를 빌라 출입구 앞 덤불에 묶어두고 나는 2층 집안에서 끝내기로 했다. 드나드는 빌라 거주민들에게 누룽지는 낯이 익었을 테고, 무엇보다 붙임성 좋고 사랑스러운 녀석이니 누구든 오래 방치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때쯤 이미 끝났을 내 몸뚱아리야 어떻게 되든 별 상관없었고. 지금 돌아보면 너무 엉성해서 계획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당시에 내게는 꽤 그럴듯하고 실행해 봄직했다.


   인생의 큰 미스터리 중에 하나는, 내 사랑의 힘이 종종 멈춰버릴 때에도 나의 반려자들은 여전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랑의 힘을 발휘하면서, 나를 사랑하고 또 내 사랑을 기다렸다. 나는 주지도 받지도 못했는데도. 어떻게? 그저 기다렸던 것인가. 견뎠던 것인가. 나로부터 현저히 줄어든 손길, 눈맞춤, 미소, 목소리. 사랑을 실천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인색해졌는데도 나의 반려자들은 도대체 왜, 어떻게 나를 떠나지 않고 곁을 지킬 수 있었을까. 그 힘의 비밀은 아직까지도 신비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그때 내 계획은 누룽지가 망쳐버렸다. 정확히는 그의 췌장이 그랬다. 걱정스럽거나 불안한 날들이 이어질 때, 연달아 과식을 하거나 제대로 씹지 않고 음식을 삼켰을 때, 기름기가 많은 것을 먹었을 때 염증을 일으키는 췌장. 그런 일이 벌써 여러 해 동안 간헐적으로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나는 다루는 요령을 익히 터득하고 있었다.


[구토나 설사가 두 번 연달아 일어나면 이틀 정도 기존 식사를 모두 끊고 따뜻한 흰 죽만 조금씩 먹인다. 산책을 줄이고 조용히 쉬게 한다. 삼일 째부터는 흰 죽에 야채와 기름기 없는 단백질 재료를 섞어 준다. 소변 냄새가 연해지고 활력이 돌아보일 때까지 식단을 조심하고 무엇보다 긴 시간 옆에 있어 준다.] 


   그러니까 누룽지의 췌장염이 재발해서 간호하다 보니 죽으려던 결심이 좀 흐지부지된 것이다. 슬그머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 누룽지는 놀랍도록 사랑스러워서 누구든 거두어가 사랑의 여정을 새로 시작하겠지. 하지만 그 누군가가 췌장염 투병의 역사를 알 수 없을 것이고, 설사 내가 글로 남겨둔대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리라. 그러다가 누룽지가 자주 아프게 되고, 그러면 새 반려자가 아껴준대도 행복하지 못하리라. 그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싫었다. 어쩌면 내가 내 삶을 살기 싫은 것보다도 그것이 더 싫었던 것 같다.


   간호가 끝나갈 무렵엔, 엉성했던 자살 계획이 아예 뿌리 뽑히고 말았는데, 그 역시 누룽지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날 새벽에 자고 있는 내 앞에 버티고 앉아서 신음소리를 냈다. 내가 눈을 뜨고 “무슨 일이야?”라고 물을 때까지. 아플 때면 배뇨 사이클이 흐트러져서 한밤 중에 신호를 보낼 때가 있었기에, 소변이 마렵나 보다 싶어 같이 마당으로 나갔다. 새벽 세 시였다.


   하지만 누룽지는 오줌을 전혀 누지 않고 자전거 거치대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내 자전거가, 열댓 개의 자전거 중에서 내 자전거만이 끊어진 자물쇠 줄을 매달고 빌라 부지와 도로의 경계에 쓰러져 있었다. 누군가 펜치로 자물쇠를 끊고 훔쳐가려다 마지막 순간에 휙 팽개치고 달아나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자전거 도둑. 하필 내 것을.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으면서 나는 안개 낀 새벽 공기 속에 잠시 얼어붙어 있었다.


   몽롱한 어깨에 자전거를 얹고 휘청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누룽지는 빌라 계단을 폴짝폴짝 먼저 올라가 뒤따라 오르는 나를 가만히 기다렸다. 악몽인지 현실인지 아주 모호했다. 아침 늦게까지 자고 일어난 뒤에는 마음이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혼자가 아니니까 더 기운을 내보자는 심정이 되었다.


   큰맘 먹고 장만했던 그 센츄리온 하이브리드 자전거는 20% 할인가로 90만 원. 당시 내 소지품 중에서 맥북 다음으로 고가였고 기동성을 위한 생필품이었다. 어쨌든 그것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음침한 도난 미수 사건을 ‘그럴 수도 있지’라는 관대한 마음으로 넘겼다. 그 무뚝뚝한 동네에서 내 쓸쓸함은 영영 두려움이 될 뻔했는데.


   병이 다 낫고 나서 누룽지는 내 간호에 보답하듯이 이번에는 자기편에서 열렬한 돌봄을 주었다. 정서적 안정에 특히 효과가 좋다는 털 테라피와 타액 테라피, 그가 제일 자신 있어하는 테크닉으로 말이다. 아침마다 아밀라아제 세수 의식을 하고 서로 옆구리를 꼭 붙이고서 수많은 밤들을 넘겼다.




   위에 기술한 이야기는 4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그 후로 죽고 싶을 만큼 우울했던 적이 다시는 없었다면 좋겠지만 그건 아니다. 그래도 어떤 계획-엉성하든 아니든-을 세우는 데까지, 더구나 누룽지를 두고 간다고 마음먹는 일까지는 없었다.


   근래 두어 달 동안은 꽤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무엇이 도움이 된 것일까? 어떤 것이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해 내가 덜 흔들리는 것일까? 똑똑히 말할 수가 없다. 나는 여태껏 한 번도 그럴 수 없었다. 실체를 전부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요즘의 좋은 날들 역시 풀지 못할 미스터리로 남겠지만, 이 글을 쓰면서 안온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글을 쓸 수 있게 나를 격려한 <반려종의 시선: 아픔과 돌봄에 대하여> 글쓰기 워크숍도 그랬다. 워크숍에서 사람들과 주고받았다. 용기 어린 고백들, 명료한 깨달음들, 별처럼 반짝이는 그리움의 말들, 영롱한 구슬 같은 기억의 조각들, 돌봄을 주고받는 저마다의 철학과 실천들.


   그 일련의 과정을 사랑의 힘이라고 불러도 될까. 사랑을 한껏 흡수하고 또 방출하는 시공간을 우리는 만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더디더라도 이 일을 계속하겠다. 내 혈관 속에 사랑의 힘을 더 많이 잠복시킬 수 있도록. 이것은 어쩌면 계속 살아보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

하리타


<반려종의 시선> 글쓰기 워크숍 강사.

신경 장애를 갖고 있어서 삶이 늘 곡예처럼 느껴지지만 열정이 타오를 때만큼은 그것을 잠시 잊는다.

작가의 이전글 쌜리의 법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