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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는 꿈

해사 / 반려종의 시선 2장. 아픔과 돌봄에 대하여

   닭, 나의 반려동물


   “해사, 들어가 앉아라.”


   열네 살 국어 시간이었다. 글쓰기 후 글을 발표했는데 선생님께서 나를 지목하신 거다. 난 내가 쓴 그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눈물이 고인다.) 내가 너무나 미안하게 떠나보낸 ‘닭’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몇 자 읽지도 못한 채 내가 대성통곡 하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와 살았을 때 자주 했던 말이 있다.


   “그게 다 기름, 설탕, 소금 맛이지요, 뭐 겄시유?”


   아버지가 수십 그릇을 비워내셨을 너무나 사랑하는 간짜장. 그리고, 치맥으로 무지막지하게 소비되고 있는 치킨! 난 그것들의 맛을 저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기름지고 달고 짠 맛! 고구마튀김, 새우튀김, 김말이든 닭튀김이든 킹왕짱 끝내주게 맛있는 것이 된다.


   치킨이란 말은 기만적 언어다. 고기란 말도 틀렸다. 더 오래 살 수 있는 닭, 더 오래 살아 마땅할 생명이거늘. 성장촉진제와 항생제를 잔뜩 먹여서 일찍 잡아 죽여 핏기와 내장 등을 제거하고 밀가루 등을 입혀서 기름에 맛있게 튀겨낸 것이 치킨이다. 고기가 아니라 죽은 동물의 몸이다. 계란이 아니라 닭의 알이다. 우유가 아니라 여성 소의 젖이다. 물고기가 아니라 물에 사는 존재, 물살이다…. 그 옛날 국어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해사, 들어가라.’


   그러니까 난, 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살아있는 닭을, 한때 나의 친구였던 닭을 기억하고 싶어서 애쓰다 열이 좀 올랐다. 분노가 많은 나는 티 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어딜 가나 미운털 되기 십상, 불편 유발자 해사.


   1990년에서 1991년 그 어디쯤. 충남 서천군 비인면 관리 408번지에 병아리 셋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5학년이던 나와 동생이 병아리를 ‘구매’해 온 것이다. 병약한 것들이 학교 앞에서 주로 ‘판매’된다고 하던데, 다행히 고고와 꼬꼬와 꼬끼오는 무럭무럭 참 잘도 자랐다. 꼬끼오는 남성 닭(수탉), 꼬꼬와 고고는 여성 닭(암탉)이다. 그때까지 반려동물 한 명도 맞이해 보지 못했던 우리는 애지중지 그 존재들은 대하였고 닭으로 자랄 때까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친구처럼 놀 때도 많았다.


   그들의 눈을 바라보면 놀랍게도 대화라도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꼬끼오는 내가 어느 순간 기운을 받아 뛰기 시작하면 나를 따라서 집을 한 바퀴고 두 바퀴고 함께 뛰곤 했다. 그럴 때면 내가 뭐라도 된 듯 신이 났던 것 같다. 강아지도 송아지도 아닌 닭이 따라올 때 조금은 무서우면서도(꼬끼오가 나를 부리로 찍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함께 달리는 기분이 좋았다.


   꼬꼬는 온몸이 갈색 빛깔인 깃털을 가진 닭이었다. 나와 친밀했을 텐데 아쉽게도 그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눈을 더 자주 맞추고 말을 더 많이 건넸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를 해봐야 기회는 다시 오지 않지. 고고는 온통 흰 닭이었고 동생과 친밀했다.


   그놈의 월드콘이 사달이었다. 롯데 월드콘 광고모델로 사상 초유의 납작 눌린 강아지 퍼그가 등장해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퍼그는 반려동물 전성시대를 연 강아지가 아닐까 싶다. 부모님은 그 시골 마을에서 얼리어답터(?)처럼 집 안에서 함께 사는 강아지 ‘못난이’를 데려온다. 나의 관심은 온통 그 못생겨서 귀여워 죽겠는 강아지에게 쏠려버린다.


   우리 집 408번지와 큰댁 508번지는 2차선 도로를 넘어서 가야 한다. 걸어서 5분 거리. 그때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치킨 혹은 백숙을 위해 닭을 잡으려고 큰댁에 보냈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안 돼요. 절대 죽이면 안 돼요.” 하고 말했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학교에 가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하얀 닭 고고가 큰댁에서 집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똘똘하게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기억해 내고 돌아왔다는 소식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그리 똑똑할 수가 있을까! 혹시 사랑이 그리웠을까.


   그때부터 정말 신줏단지 모시듯 극진했어야 했는데 그런 시간이 길지 않았던 듯하다. 못난이의 등장과 또 다른 강아지의 등장. 강아지는 닭보다 너무 말랑 간지러웠고 말을 좀 더 직접적으로 알아들었으며(꼬끼오가 얼마나 똑똑했는지를 잊은 멍청이!) 치명적으로 귀여웠다.


   비 오는 날, 닭들은 나의 곁을 떠났다. 닭장 속에서 죽어 있는 닭들을 본 나는 죄책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괴로워했다. 그래서 저 첫 장면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엉엉엉 우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어릴 적 시골 그 마을에서 잔치를 했다 하면 통닭을 먹었다. 학교 한 해 수업이 끝나면 잔치를 하며 통닭을, 잘 사는 집 친구 생일 잔치에 가면 또… 도대체 그 닭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다가 왔던 것일까.


   “저 어릴 때는요, 연서시장 닭집에서 닭을 직접 키웠어요. 그러고 손님이 사겠다고 하면 살아있는 그 닭을 들어다 뜨거운 그 속에 넣어버렸어요.”


   어느 자리였는지, 내 거주지를 밝히자 어느 어르신이 하신 말씀이다. 어릴 때 연신내에 살았는데 그 옛날 연서시장에서 본 장면을 가감 없이 해주시는 거다. 뜨거운 물 아니면 뜨거운 불이었을 것이다. 닭들의 수난사를 나는 오래도록 몰랐고 오래도록 방관했다.


   열네 살 해사는 꼬끼오를 떠나보낸 열두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닭을 이용한 요리를 먹지 않았다. 그것이 비건의 시작이었다. 존재를 알아버린 순간, 나와 같은 생명일 뿐이란 걸 알아버린 감각, 안 이후부터는 선택지가 여러 개일 수 없다.


   자존감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자학하며 오랜 세월을 버티듯 살았다. 쓸모를 찾고 싶었다. 사회를 의심했지만, 내가 이상한 거라면, 나만 사라지면 괜찮게 돌아가길 바라기도. 습관적인 자살 사고와 한 번의 자살 시도. 자존감이 땅속을 뚫고 끝없이 가라앉을 것 같았던 시절에,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었다. 무능한 날 살려준 것 같은 느낌. 그러나 ‘감사합니다’라고 하기엔 사람들이 별로였다. 참 별로이고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들과 몇 년 일했고 이대로 더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내 발로 나왔다. 환경단체였고 입사 당시 채식주의자는 단 한 명이었다. 어떤 지표는 납작하지 않은 통계가 되기도 한다. 그때 어리석게도 난 처음에 채식을 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초반에는 동료 몇을 따라서 동물의 사체를 안주랍시고 먹으며 술을 마시기도 했다. 미련스러운 언행은 낮은 자존감 탓이라고 핑계 삼았다.


   이후 소위 인권을 위한다는 서울시 기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다 부당해고를 당했다. 그 복직 투쟁은 그리고 직장 내 괴롭힘 진정은 나를 충분히 죽고 싶게 만들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이다. 혹자는 무심하게 넌 왜 이렇게 인생이 안 풀리냐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기 딱 좋은 인생. 그러나, 난 나와 근접해 가고 있기에 살만하기도 했다. 살만해졌을 때 당한 일이라, 투쟁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다시금 친근해진 자살 사고‘들’. 사회는 병들었고, 인간은 지구 위 생명체 중 가장 정나미 떨어지는 존재라는 감각은 선명해졌다.


   어릴 땐 줄곧 반장을 맡았다. 책임감이 지나쳤고 타인의 마음을 살피고 배려하는 일이 몸에 배기도 했다. 왕따란 걸 당한 이후에는 잘난 체하며 살지 않는 게 유리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몇십 년을 난, 내가 왕따 당할 정도로 못돼 쳐먹은 한심한 인간인데 친구들과 어울려 살아남기 위해 ‘착한 척’을 한다는 자의식이 강했다. 왕따 사건은 실은, 악마 같은 초등학교 담임으로 인한 스트레스 탓이었다.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들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의 얼굴에 상처를 낸 일로 난 몇십 년 동안 죄책감을 안고 살았구나! 그 이야기를 풀어내며 정말이지 엉엉엉엉 울던 나. 친구의 얼굴에 생채기를 낸 나의 마음을 내가 용서하기 어려웠다. 또한 모친으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 오랜 세월을 몸부림을 쳤던 나! 그 사랑에 관한 가장 어려운 숙제를 부여받았다. 내가 나에게 사랑을 줄 것! 원가족들이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든 내가 중심을 잡고 나답게 살아가면 되는 꽤 간단한 답도 있구나!


   자존감은 쉽사리 올라가지 않는다. 자신을 미워하고 방치하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과 융화하기란, 올챙이가 한 시간 만에 개구리가 되는 일처럼 불가능한 것이다. 나를 돌보며 잘 지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할 수 있는 걸까. 나에게 잘해주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 나였다니….


   눈에 밟히는, 아버지


   부당해고를 한 전 직장과의 투쟁을 얼른 끝내면 좋았을 시기에, 어긋나는 톱니바퀴처럼 아버지가 내 집에 오셨다. 농사지으며 고향에서 혼자 살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이후 딸들 집을 전전하는 아버지. 불쌍한 울 아부지.


   딸을 넷 두었고 그 딸들과 나는 소통하지 않는다. 그런 정치판 속 피해자인 아버지는 노심초사 어떤 마음일지 헤아릴 품이 없다. 저들과 엮인 내가 불쌍하고 저들 때문에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하루를 버틸 뿐.


   1년 2개월 만에 다시 내 집에 오신 아버지는 경도인지장애가 더 나빠진 상태였다. 건강염려증도 더 깊어 보여 내가 다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아버지와 대화하다 보면 생각조차 싫은 아버지의 다른 딸들이 생각났다. 경도인지장애 환자의 70% 이상이 5년 안에 치매로 진행된다고 하는데, 그런 아버지를 딸 둘이 모시면서도 매 끼니 하루 세 끼를 혼자 차려 드시게 해? 하루에 오전, 오후 두 번이나 길게 낮잠을 주무시게 해? 딸 하나가 직장에 나가지 않아 집에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지냈다고 하니 욕지거리가 내뿜듯 나왔던 나의 속마음. 커지고 쌓여가는 화. 결국 그 짜증과 화는 가여운 아버지에게 표출되었다.


   다니던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예약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를 동시에 만나 가족치료를 해주셨다. 건강 염려증이 그득한 아버지만의 문제도, 부당해고 등으로 화가 그득한 나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물론, 돌봄노동이 전적으로 나에게 쏠려 있는 구조적 문제는 있었다. 그러나 현상을 멀리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나를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주변 지인들의 권유로 돌봄노동의 분산을 위해 자매 한 명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혼자 2박 3일 템플스테이와 지인의 집 방문 등 여행을 다녀오며 쉬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확실히 정신과 약을 먹으니까 화가 줄었다. 사실은 화병 약이 아니었다. 내가 이전에 먹었던 우울감과 불면에 도움이 되는 약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아버지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네가 언성 안 올라가고 부드러워지니까 내가 마음이 좋다고.


   아버지와 집에 있을 땐 가슴이 갑갑하고, 멍때리지 않게 아버지와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강박(주로 서울 투어 드라이브나 당일 여행, 두뇌 가로세로 낱말 맞히기나 한자 공부, 피아노 치기 등)에 휩싸여 마음의 짐이 많았다. 아버지 당신도 혼자서 뒷산에 산책 혹은 운동을 나가시는 것보다 나와 같이 다니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오늘은 어디 갈 계획이여?” 하고 묻는 일에 내가 긴장이 되곤 했으니까. 짜증도 많이 냈다. “아부지, 어떻게 매일 여행을 가고 드라이브를 해요? 나도 날 돌봐야 하는데!” 집안에서는 갑갑해지기 일쑤였고, 일정이 있어 바깥에 나오면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수없이 전화를 걸었다. 그러곤 말을 했지, 사랑한다고.


   장을 보는 일, 재료를 다듬고 반찬을 만드는 일, 빨래를 돌리고 널고 개는 일, 집 안 청소 및 단장, 고양이 두 분 챙기고…. 아버지와 지내는 동안 고양이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어서 병원 신세도 많이 졌다. 신용카드를 수없이 긁었는데 지나고 보면 나의 불안증에서 비롯된 기우였다. 스트레스를 받아 잠시 반응이 나온 것뿐 심각한 질병은 없었다. 나만, 나로서 평안했다면, 아버지도, 고양이도 평화였을 거라는 사실이 나를 압박해 오던 시절이었다.


   그럭저럭 아버지와 네 식구의 일상이 흘러갈 때, 이제 좀 지낼 만하다고 느낄 때 아버지는 떠났다. 데이케어센터에 같이 상담을 받고 온 이후 이런 말씀을 남기고서.


   “네가 날 환자 취급해서 우리는 안 맞아.”


   그로부터 나흘 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통보를 해주었다. ‘김00 님, 치매 등급 받으셨습니다. 장기요양등급 5등급’ 내가 바라던 노인주간보호센터에 건강보험공단 지원을 받아 저렴하게 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 당사자는 내 곁에 없다. 이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버지의 인생은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 이렇게 저렇게 굴러갈 것이다.


   내가, 내가 되는 꿈


   돌이켜보면 동물권 활동가들과 여성주의공동체에 기대어 시간을 견디었다. 원가족이 날 미쳐버리게 했던 순간순간마다 버티는 힘은, 있었다. 동료 동지 덕분에 내가 괜찮은 인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보았다. 환경운동 단체에서 일할 때 한 동료가 나에게 아웃사이더라고 표현해서 놀란 일이 있다. 난 내가 주류라는 걸 의심하지 않은 것 같다. 똘기가 있음은 알고 있고 그 똘기를 사랑은 하지만, 똘아이이고 싶지는 않은 이율배반적 욕망.


   비인간 동물들을 위한 법정에 연대하기 위해 법원에 방청을 갔다. 거기서 무수한 존재들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서 대형마트에 들어가 직접행동 액션을 함께 했다. 난 내 생각만큼 강심장이 아니었다. 그러다 만난 동물권 활동가들(나는 활동가다! 우리는 모두 활동가다!!)과 모닝 페이지 모임을 시작했다.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자아 성찰’이 꿈틀 시작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검열관’이 눈을 뜨기 전에 의식의 흐름에 따라 막 써내려가는 모닝 페이지는 나에게 구원이 되었다. 회피와 기피, 투사와 동일시, 강박과 다그치기 등 수많은 것들을 하나씩 조금씩 알아차리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심각하다 할 정도로 내가 나를 단속하고 다그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경악하기도 했다. 나를 가장 증오하고 나 자신을 패대기치듯 함부로 대한 당사자는 다름 아닌 나였다.


   여성주의를 처음 접한 건 2018년 여성 활동가 리더십 교육에 참여하면서다. 2012년부터 정당에서 만나온 당원동지들이 왜 나에게 페미니즘을 권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면 괜히 서럽다. 난 비건이 좋으면 비건 책을 비슷한 감성의 ‘가능성이 높은’ 친구들에게 기꺼이 선물했는데. 내가 가능성이 낮은 군(群)이었던가 보다.


   이렇게 좋은 안경, 이토록 좋은 옷, 이렇게 멋진 세계. 도서관에서 서점에서 골라다 관련 책들을 읽으며 희열을 느꼈다. 그간 멍청스럽고도 협소한 관념에 갇혀 살았던 내 지난날들이 조금씩 해석되고 이해되기 시작했다.


   스스로 죽기를 시도한 이후 다니던 심리상담도 꾸준히 받았다. 동시에 동네 협동조합에서 여성주의를 공부하다 보니,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 새롭게 나와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난 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나를 싫어하는 상태에서는 무엇을 해도 흡족하지 못했고 행복은 늘 찰나, 짧았다.


   ‘서두를 필요 없어요. 반짝일 필요 없어요. 자기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될 필요 없어요.’ 버지니아 울프의 저 문장을 크게 적어 붙여놓던 때 한창 모닝 페이지를 썼고, 내 생이 전반적으로 편안함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은’ 시기였다. 난 대단한 무언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 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을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저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반짝일 필요가 없는 거였구나. 그냥 나 자신이 되면 되는 거였구나! 난 나다움을 찾았다고 여겼는데 너무 쉽게 사람들에 의해 꺾여 넘어져 버렸다. 부당해고 이후 파편 난 내 자의식이랄까 자존감과 자신감을 긁어모으는 청소부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나와 호흡을 같이 할 거라는 희망을 근래에 버렸다. 내가 돈을 필요로 할 때 취직이 곧바로 될 거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박살이 났다. 다니던 일터를 관두고 나니 경제적 곤궁과 함께 무한한 자유가 찾아왔건만, 마구 우울해졌고 진저리나도록 불안했다. 지원한 원서가 무응답으로 떨어질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불안해지는 마음이 무서워졌다. 다시 죽음을 떠올리게 될까 두려웠다. 일터만 생긴다면 행복을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난 괜찮지 않다. 죽으면 편하겠다는 그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살아갈 이유를 매 순간 찾는다. 먹고 바로 눕지 않기 위해 정신줄을 꼭 붙잡기도 하고, 잠수 타 버리고 싶은 욕구와 겨루며 글도 써나간다. 반짝이지는 않더라도 정말이지 나답게 살고는 싶다. 그게 어쩌면 아마도 무척이나 멋진 형태였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날 보듬어 주는 꿈 같은 꿈을 꾼다.


-

해사


글쓰기를 숨구멍으로 여기는 인간 동물.

지구별을 조속히 떠나겠다는 일념을 품고서 고양이들 은혜로 그럭저럭 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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