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통증

짧은 소설

by 젼정


아린은 반복해서 문장을 읽었다. 마음에 닿은 단어와 문장이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 느낌은 타인의 말이나 행동으로 비롯된 상처 내지는 불쾌함, 그런 것들과 분명 달랐다. 활자에 날카로움과 상심이 있었던 걸까. 단어와 문장이 아린의 마음속에 파고를 만들었다. 그 파고는 완만하여 금세 사라지기도 했고, 급격하게 높아져 마음을 순식간에 흔들어 놓기도 했다. 아린은 그 독특한 마음의 통증을 좋아했다. 통증을 좋아하다니, 아린은 스스로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대체 그 통증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아린이 읽었던 문장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던 적은 없었다. 분명 달랐다. 그런 비슷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어렴풋이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확신에 찬 얼굴로 그 말을 꺼낼 수 없다는 부분에서 아린은 언제나 애매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런 통증은 아린을 늘 곤란한 기분으로 밀어 넣기도 했다. 어떤 문장으로부터 시작된 마음의 통증을 좋아하는 동시에 곤란해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아린은 알고 싶어졌다.


왜 그렇게 그 문장에 반응하게 되는 걸까? 아린은 안방 화장대 연필꽂이에서 볼펜을 하나 꺼냈다. 그다음 식탁에 앉아 수첩에 그 문장을 적었다. 평소 손으로 긴 문장을 쓴 적이 없어서인지 손목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자음과 모음은 제멋대로 날뛰었다. 균형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글씨체였다.



그 순간 그는 몸을 일으켜 다 마시지도 않은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 버렸다. 그녀의 아파트에서 나오며, 그는 그녀의 집에서 지내려 한 애처로운 환상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떤 종류의 관계였든 실패해버린 그들의 관계 때문에 흐느껴 울었다. 157p.


메리앤은 손에 든 컵이 너무 뜨겁지만, 컵을 다시 내려놓는 대신 고통이 손가락 속으로, 살 속으로 퍼져나가게 그냥 내버려 둔다. 188p.


소설 ‘노멀 피플’ 중에서




소설 ‘노멀 피플’의 문장을 읽을 때, 아린이 실체를 밝히고자 하는 마음의 통증은 더 선명해졌다. 아린은 소설 속 두 사람의 관계가 부서지고 깨지는 장면을 상상하며,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리 하여 솔직할 수 없었던 어떤 날의 자신을 책의 가장자리로 끄집어냈다. 울고 싶은 기분과 비슷한 느낌이긴 했으나 결코 눈물이 나지 않았던 어떤 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순간 그 이상한 기분이 어렵지 않게 허공에 그려졌다.

아린은 자기 자신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아린은 대체로 주도권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해도 남에게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했다. 한번 맺은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자신을 지속적으로 불편하게 만들면 언제든지 그 관계를 먼저 놓아버리고 싶어 하는 것도 아린이었다. 타인이 단단하게 묶은 매듭도 소용이 없었다. 아린은 서서히 그 매듭을 풀어가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그 매듭을 손보려고 노력하는 쪽도 아니었다. 그저 그 매듭을 응시하다가 견딜 수 없이 괴로워지면 어떤 지점인지 고려하지 않고 아린은 가위로 싹둑 그 관계를 잘라냈다. 잘라낸 관계는 다시 이어 붙이기 힘들었다. 상대가 태도를 바꿔도 소용없었다. 아린은 가위를 주머니에 챙겨 들고 돌아섰다. 거기에는 그 어떤 말도 보태어지지 않았다. 아린은 그렇게 타인에게 냉담하게 굴면서도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언제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매듭을 자를 때 냉담한 얼굴을 한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이성과의 관계에서 아린은 또 달랐다. 주도권을 자신이 가진 것처럼 굴면서 질질 끌려다니기도 했다. 상대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감한 순간에는 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낮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차갑게 굴고, 밤에는 처절하게 매달렸다. 아린의 태도에 상대가 반응을 보이면 수그러든 감정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아린은 주머니가 텅 빈 희망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의 마음을 살살 긁었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상대는 그 어떤 말에도 상처를 받지 않았다. 그것이 아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상처를 주려고 덤벼 들어도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긁어도 상처가 나지 않는 상대의 마음을 지켜보며 아린은 입을 닫았다.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으로 그 마음을 수습하기로 결심하면서.


소설 속 주인공이 뜨거운 컵을 내려놓지 않고 손가락 속으로, 살 속으로 퍼져나가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처럼 아린은 고통을 자신의 마음에 머물게 했다. 별 일 아니야, 금방 지나갈 거야,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한 적은 있었지만 진심인 적은 없었다. 정상적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를 다독이긴 했지만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 그 고통을 극대화시키고 싶어 했다. 아린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린은 고통을 보호하기 위해 입을 닫았다. 자신의 상처를 계속 응시했다. 상처가 어느 정도 나아갈 때 또는 나아가기도 전에 그 상처를 손톱으로 뜯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상처를 응시하기를 반복했다. 그 반복은 작은 상처를 큰 상처로,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흉터로 만들었다. 아린은 그런 식으로 상대와 자신의 관계 사이를 마무리 지었다. 흉터가 자신의 일부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아린은 그 행동을 멈출 수 있었다. 그제야 그 관계를 별 거 아닌 것처럼 여길 만한 마음이 준비되었다고 아린은 스스로 새긴 흉터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 성공했다.


소설 속 문장에서 그 상처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아린은 뒤늦게 깨달았다. 다 끝난 관계에서 느꼈던 통증이 예상할 수 없었던 순간 툭 튀어나오다니, 아린은 시간이 뒤섞여 있음을 실감했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상처를 말하지 않는 것으로, 작은 상처를 흉터로 만드는 것으로, 그 상처가 해결되었다고 아린은 믿었다. 자신의 그 복잡한 감정을 그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없다고 아린은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린의 생각은 틀렸다. 그 마음의 통증이 저 문장에 있지 않은가.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마음의 통증이 만져졌다. 보듬을 수 있는 대상처럼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과 대상이 선명해졌다. 아린은 이제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문장이 과거의 상처를 긁었고, 그것으로 인해 그때의 통증을 지금 느낀다는 사실을 아린은 인정해야만 했다.




아린의 냉장고에는 그런 것들이 있었다. 먹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않는 음식과 재료들. 끝끝내 그 음식과 재료들을 먹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아린은 상할 때까지 그것들을 내버려 두었다. 아니, 상해서 먹을 수 없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였다. 멀쩡한 음식과 재료를 내다 버릴 정도의 결단력과 실행력이 아린에게는 없었다. 아린은 그것들을 버려야 할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버려도 괜찮을 정도의 명분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냉장고에서 그것들이 쓸모 없어지는 동안 아린은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한번 뭐라도 만들어 볼까. 어차피 버릴 건데 더 상하기 전에 버릴까. 과감하게 그것들을 꺼내 요리로 만들어 놓은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버려질 것으로 분류된 것들을 먹고 싶을 리 없었다. 마음속에서 버려진 것들은 실제로도 생기를 가질 수 없었다. 한두 번 젓가락을 해서 입안에 그 음식을 넣는다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그것들은 결국 버려질 운명인 것처럼 뭉개졌다.


먹지 않으면 버려도 된다.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아린은 냉장고 구석에 있는 음식들을 보면서 이런 말들을 떠올렸다. 모든 음식과 재료가 완벽하게 무엇이 될 수는 없다. 유통기한과 상관없이 어떤 음식은 버려질 운명에 처한다. 아린은 마트에서나 길에서 먹을 것을 살 때 나름대로 신중한 태도를 갖춘다. 적당히,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사야 한다고 자기 자신에게 일러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들은 끝내 버려졌다. 그럴 때마다 아린은 죄책감을 느꼈다.


처음부터 버리기 위해서 산 것들은 없다. 필요해서 산 것들도 어느 날에는 거짓말처럼 불필요해진다. 먹고 싶었던 것도 어느 날 먹기 싫어진다. 너무 갖고 싶었기에 몇 달을 공들여 악착같이 사들인 물건도 어느 날 바라보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의미해져 있다.

아린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들여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없었던 것을 곁에 두었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을 생각했다. 모든 관계가 처음 같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슬픔을 생각했다. 없었던 것을 곁에 두어 기뻐하다가 이내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리고자 하는 마음의 변덕을 생각했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어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아린은 실패한 관계들을 떠올렸다. 음식이 상할 때까지 내버려 두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스스로 잘라낸 관계의 매듭을 손바닥으로 쓸어 모으듯 마음의 통증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를 상자에 천천히 모았다. 아린은 볼펜으로 쓴 문장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누르며 눈으로 읽었다. 마음이 아파졌다.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해결될 수 없는 미결의 상처가 아린의 곁을 그렇게 맴돌고 있었다.